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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인산악회

[1969회] 국토종주 한강나루길 1회차 산행기

by 출판N산악 2022.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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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회] 국토종주 한강나루길 1회차 산행기

◆ 걷기 코스 : 아라한강갑문, 판개목 - 행주대교 – 강서습지생태공원 - 방화대교 – 마곡대교 – 가양대교 – 월드컵대교 – 성산대교 – 양화대교(제2한강교) - 당산철교 - 서강대교 - 마포대교 - 여의교 – 대방역 6번 출입구

◆ 걷기 일시 : 2021년 9월 18일 오후 1시 20분 ∼ 오후 5시 50분 (4시간 30분 걷기)

◆ 날씨 현황(서울 강서구 개화동) : 맑음. 온도(19∼30)

◆ 참석 인원 : 김현호, 박성원, 박 연, 박찬영, 부길만, 오상환, 이미래, 이정수, 이정일, 임순재, 강혜숙 (계 11명)

◆ 안내자 : 이정일

◆ 상세시간

12:00 개화역(9호선) 2번 출입구

12:00 ~ 12:50 16-1 버스, 개화역 승차 – 코콤 하차. 코콤에서 아라한강갑문 인증센터까지 걸어서 이동

12:50 ~ 13:20 중식

13:20 아라한강갑문 인증센터

13:24 강서습지생태공원 진입

13:35 행주대교

13:55 ~ 14:00 강서안내센터 휴식

14:07 방화대교

14:25 마곡대교

15:10 가양대교

15:44 안양천 합류지점

15:52 월드컵대교

16:00 성산대교

16:32 양화대교

16:39 당산철교

17:38 여의교

17:50 대방역

18:00 ~ 19:00 약촌마을

1. 한강 및 한강나루길 소개

한강은 길이가 494km이고, 한반도 전체에서 네 번째(압록강, 두만강, 낙동강, 한강 순)로 길며, 남한에서는 두 번째로 길다. 유량으로 보면 한반도에서 가장 많고, 유역면적으로는 35,770km²로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매우 큰 강이다. 북한강(강원도 회양군)과 남한강이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에서 만나 서울특별시를 통과해 김포 반도에서 황해로 들어간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폭이나 유역이 비등하지만, 강의 원류는 언제까지나 가장 긴 흐름을 기준으로 하므로 한강의 원류는 남한강이다.

한강의 발원지는 검룡소로 1987년 국립지리원(현 국토지리정보원, https://www.ngii.go.kr/kor/main.do) 도상 실측을 통해 한강 최장 발원지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 하천관리지리정보시스템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국토지리정보원 발행의 지형도에서 한강의 법정 하구인 유도산정으로부터 남북으로 그은 직선에서 가장 거리가 먼 발원지를 곡선자로 계측한 결과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산(1,418m) 북쪽 계곡, 검룡소를 우통수보다 27㎞ 상류임을 확인 "한강의 발원지"로 공인하였다(http://river.go.kr/WebForm/sub_02/sub_02_03.aspx). 태백시청은 검룡소가 한강의 발원지라고 홍보하고 있다(https://tour.taebaek.go.kr/tour/tour/tour_clear/tour_clear_springhead).

한강이라는 명칭은 순우리말 '한가람'에서 비롯하였다. 옛말에 '한'은 '큰', ‘가람’은 강을 가리킨다. 즉 '큰 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자 표기의 '漢'은 음차일 뿐 중국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한강은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 중국의 한・위나라와 진나라 때의 지리지에서는 한반도의 중간 허리부분을 띠처럼 둘렀다는 뜻에서 ‘대수(帶水)’라 불리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아리수(阿利水)’라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에서는 ‘욱리하(郁里河)’라 불렀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한산하(漢山河)’ 또는 ‘북독(北瀆)’이라 표기한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는 상류를 ‘이하(泥河)’, 하류를 ‘왕봉하(王逢河)’라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흘러내리는 강이라는 뜻으로 ‘열수(洌水)’라 불린 기록이 있으며 모래가 많기 때문에 사평도(沙平渡) 또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한강(漢江)’ 및 ‘한수(漢水)’라 불리었으며, 서울 부근은 ‘경강(京江)’이라 불렀다. 한강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시점은 백제가 중국의 동진과 교류하기 시작한 즈음인데, 그때부터 ‘한수(漢水)’ 또는 ‘한강(漢江)’이라 불렀다 전해진다.

한강 본류는 구간에 따라서 명칭이 달라진다. 경기도 양평군에서 충청북도 단양군에 이르는 구간은 남한강, 강원도 영월군의 구간은 동강, 강원도 정선군의 구간은 조양강, 그보다 상류의 태백시 구간은 골지천 등으로 불린다.

특히, 서울 부근의 한강에 대해서도 그 지역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다. 행주대교 밑으로 흐르는 한강이 임진강과 만나 서해로 빠져드는 경기도 김포군 북쪽은 드넓은 흐름이 할아버지와 같다고 하여 ‘조강(祖江)’이라 불렸다. 행주산성의 하류를 ‘왕봉하(王逢河)’, 덕양산의 행주산성 앞은 행호(幸湖), 방화대교 부근은 ‘투금강(投金江)’, 가양동 부근은 ‘공암진(孔巖津)’, 양평동 부근은 ‘양화도(楊花渡)’, 양화대교(제2한강교)가 있는 방향은 ‘서강(西江)’ 또는 ‘서호(西湖)’, 옛날에 마포나루가 있던 서울대교 언저리는 ‘삼개’ 또는 ‘마포강(麻浦江)’, 원효로동 남쪽은 ‘용호(龍湖)’ 또는 ‘용산강(龍山江)’이라 불리었다. 노량진동 북쪽은 ‘노들강’, 동작동 북쪽은 ‘동작강(銅雀江)’, 한남동 남쪽은 ‘한강도(漢江渡)’, 뚝섬의 하류 부근은 ‘동호(東湖)’, 성동구 옥수동의 한강변은 두모포(豆毛浦) 또는 두물개 · 두멧개 · 두뭇개라 불리었다. 송파 부근은 ‘삼전도’, 광장동 앞은 ‘광진’, 현재의 강동대교 부근은 ‘미호(渼湖)’, 팔당댐은 ‘도미진(渡迷津)’이라 불렸다. 서울 구간을 ‘경강(京江)’이라 불리었으며, 서울이 외곽인 경기도 여주시 언저리는 ‘여강(驪江)’이라 불리었고, 충주에서는 한강을 ‘달래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강나루길”은 한강이 흐르는 지역마다의 고유한 아름다운 정경을 감상하며 회원의 건강증진과 친목도모를 위하여 걷고 또 걷는 것이다. 걸으면서 옛 선조들이 한강에서 느꼈던 정취와 감상을 우리도 느껴보고자 한다.

“한강나루길”은 한국출판인산악회에서 임의적으로 명명한 것이다. 본 산악회에서는 “한강나루길”은 ‘아라한강갑문’에서부터 ‘충주탄금대’까지의 걷기 길을 말하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국토종주하는 4대강 길을 나름대로 총칭하여 한강은 ‘한강나루길’, 낙동강은 ‘낙동강나루길’, 금강은 ‘금강나루길’, 영산강은 ‘영산강나루길’로 표기하기로 한다.

2. 한강나루길의 의미

한국출판인산악회에서 2021년 9월 18일부터 국토종주 걷기 “한강나루길”을 시작한다. 본 산악회는 평화누리길을 2019년 1월 19일 경기도 김포시 대명항에서 출발하여 2021년 4월 17일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까지 총 28회에 걸쳐 종주하였다. 평화누리길을 마무리될 무렵 본 회원들은 걷기의 의지와 열성으로 색다른 걷기를 희망하여 선택된 것이 국토종주 걷기였다.

국토종주 걷기는 4대강(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을 기본으로 걷기를 하고 파생된 걷기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전 국토를 걸으면서 각 지역 고유의 특색, 인습, 전통, 문화 등의 이야기 거리, 볼 거리, 맛 거리 등을 듣고, 보고, 먹고, 느끼며 걷는 것이다.

시작하는 2021년 9월부터 매달 세 번째 토요일에 약 36회 3년을 기약으로 시행하지만 그 이상의 세월이 걸릴 수도 있으며, 이어서 또 다른 걷기 길을 발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토종주를 위한 선도적이고 창의적인 걷기를 하면서 회원의 건강증진과 친목도모는 물론 낭만적 걷기문화의 건전한 사례를 기록하고자 한다.

3. 한강나루길 산행기

“한강나루길”은 ‘아라한강갑문’에서 시작하여 ‘충주 탄금대’까지 서울 구간 56km와 남한강 구간 132km를 합하여 약 188km를 걷는 것이다. 국토종주를 위한 첫 번째 코스로 “한강나루길”을 결정하였고 이번 주가 1회차가 되는 것이다. 평상시 토요정기산행보다 더 많은 인원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이번 코스에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한 회원은 별도로 걷겠다고 알려와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번 코스는 중식 시간 1시간, 휴식 시간 1시간, 걷는 시간 4시간 등을 모두 포함하여 전체 약 6시간이 소요되는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래서 평상시에 모였던 오후 1시 30분보다 빠른 오후 12시에 개화역에서 만나는 것으로 공지하였다. 오후 12시에 출발하여 오후 6시 경 반포대교에 도착하면 일몰시간 때 보는 한강의 아름다운 정경을 감상할 것으로 계획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계획으로만 끝나는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개화역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30분, 1층 대합실에서 준비해 온 떡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편의점에서 구입한 아이스커피로 후식을 취하니 배의 든든함이 걷기의 자신감으로 은근히 몇 배로 증강시킨다.

이번 주 걷기에는 회원 10명과 이미래 회원의 지인 1명이 참석하여 모두 11명이 되었다. 아라한강갑문에서의 단체 인증사진에서와 같이 참석자의 얼굴에는 첫 회라는 의미가 부각되었는지 자신감과 충만함이 더욱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한강나루길”은 ‘아라한강갑문’에서 시작된다. 이곳에는 ‘한강나루길’의 첫 출발지임을 인증될 수 있는 ‘아라한강갑문 인증센터’가 설치해 있다. 또 한국수자원공사의 랜드마크 건물은 더욱 우람하게 보인다. 이곳을 판개목이라고 한다. 판개목에서 바라본 북한산은 날씨가 맑아 평상시보다 깨끗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판개목은 굴포천(판개울)을 만든 선조들의 자취를 따라 땅을 파고 물길을 열어 한강과 만나는 곳(물목)이니 '판개목'이라 명하고 이를 기념하고자 쉼터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굴포천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근원은 원적산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흘러 직포가 되고, 김포현을 지나면서 굴포가 되어 제법진(濟法津)으로 들어간다.”고 되어 있다. 굴포천 상류는 대교천, 중류는 직포, 그리고 김포 일대의 하류는 굴포라는 지명으로 구분되어 불렸다는 것이다.

판개목에서 한강 상류의 직선거리로 약 700m 지점에 행주대교가 놓여져 있다. 이 행주대교부터 한강 하류를 옛날에는 왕봉하(王逢河)라 일컫는데, 이 이름의 유래는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나온다. 이곳에서 살던 행주 한씨 처녀가 높은 산봉우리의 봉화를 올려 고구려 안장왕을 맞이하였다고 해서 전해진다는 것이다.

판개목에서 자전거 전용도로를 걷다 작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강서둘레길 3코스(강서 한강길)’로 들어선다. ‘강서둘레길’은 강서구에서 강서구의 서측 개화산, 치현산, 서남환경공원, 강서한강공원을 연결하고 강서구의 생태, 역사문화, 자연경관 등 특색있는 지역 문화 볼거리와 다양한 테마가 있는 길로 1코스(개화산 숲길), 2코스(공원길), 3코스(강서한강길) 등 3개 코스를 조성한 것이다.

다리를 건너고......
익숙한 단어인 ‘평화누리길’ 자전거길이 나오며, 바로 좌측의 강서둘레길 3코스(강서 한강길)로 들어선다.
강서둘레길 3코스(강서 한강길)로 들어서면, 한강의 자연적인 생태를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강서둘레길 3코스(강서 한강길)로 들어서면, 이곳이 바로 강서습지생태공원이다. 강서습지생태공원은 서울의 방화대교 남쪽 끝에서 고양시의 행주대교 남쪽 끝 사이 한강 둔치에 있는 생태공원이다. 34만㎡의 공간에 담수지・저습지 등을 조성하고, 습생・수생식물을 심은 후 2002년 7월 1일에 개원하였다. 갈대밭과 버드나무숲이 어우러진 습지를 가로질러 두 곳의 탐방로와 철새조망대가 있다. 어류・양서류・곤충 등이 수생식물들과 어울려 습지생태계를 유지하며, 겨울에는 청둥오리, 여름에는 해오라기・백로・왜가리 등이 찾아든다고 한다. 공원은 여름에는 유아・가족 대상 관찰 및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되며, 번식기를 맞아 날아든 여름철새들의 서식 공간을 관찰하고, 강서습지생태공원의 버드나무숲길을 산책하며, 동・식물을 눈에 담는 등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강서습지의 새>, <버드나무숲길 따라 생태탐방>, <야생조류 전문가 모니터링>, <강서습지 유아생태교실(단체 대상)> 등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강서생태공원
꼬리조팝나무꽃이 아름다워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검정색 썬글라스는 쓴 여유로운 표정의 박연 회원은 세련되고도 매력적으로 비춰진다.
강서생태공원 안내센터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신 회원님

강서생태공원의 한강 건너편에 있는 덕양산 행주산성 옆의 창릉천 합류지점을 행호(幸湖)라 하였다. 행호(幸湖)의 하류를 왕봉하(王逢河)라고 보면 된다.

행호(幸湖)에는 웅어(葦魚)라 부르는 물고기가 있다고 한다. 겸재의 행호관어도(1741년)에서 14척의 배가 잡고 있는 물고기가 바로 웅어라고 한다. 웅어는 연어나 뱀장어처럼 바다에서 살다가 산란철인 봄에서 초여름 사이 강화도 주변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되는 조강(祖江)을 거쳐 행호(幸湖), 서호(西湖)까지 올라와 산란을 하였다. 웅어는 갈대 우거진 곳에 살아서 갈대 위(葦) 자를 쓴 ‘위어’라고도 한다.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는 시어(鰣魚), 『난호어목지』에서는 제(鱭)라고 표기되기도 하였다. ‘홍길동전’으로 널리 알려진 허균은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웅어를 “준치과 물고기를 말한다. 한강의 것이 가장 좋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조선 후기 문인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이 쓴 한양(漢陽)의 세시풍속서인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4월에 한양 행주에서 많이 나고 맛이 좋은 물고기로 위어(葦魚)를 꼽았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제어(鮆魚)는 속명으로 웅어(葦魚/위어)라고 하는데 한강 하류인 고양군 행주에서 잡힌다. 늦은 봄이 되면 대궐 음식을 준비하는 사옹원(司饔院)의 관리들은 (어부들이) 그물을 던져 잡은 웅어를 임금에게 진상하며, 생선 장수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횟감 사라고 소리치며 이것을 판다.”고 하였다.

사옹원은 궁중 음식 자재, 도구 등을 조달하는 부서인데, 행주산성 아래에는 위어소(葦魚所-웅어 담당 파견소)를 설치하여 진상품을 조달하였다. 사실 웅어에 대해서 현재는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에는 여러 차례 웅어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위어소(葦魚所)는 조선시대 사옹원에 속한 기관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위어소가 담당하고 있던 일은 한강에서 나는 웅어를 잡아 왕실에 진상하는 것이었다.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지명(地名)과 지방 내의 관청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양천현(陽川縣)에 위어소(葦魚所)가 있었기에 당시까지도 양천현에 위어소라 불리는 지명이 있다고 기록했다. 또한 웅어는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선물로도 이용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인조가 윤선도에게 내린 웅어들이다. 1628년 이후 윤선도가 왕자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인조는 종종 윤선도에게 웅어를 하사했다.

1795년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1735-1815)가 화성행궁에서 받은 아침수라[朝水剌]상에는 위어회(葦魚膾)가 올랐다.

위어는 수라상에 올라가는 것이면서도 상인들이 민간에 팔았기 때문에 한양에서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이 시기 손쉽게 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대전 은진 송씨(恩津 宋氏)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주식시의(酒食是儀)』에 위어회가 언급되었는데, 웅어를 풀잎처럼 저며 종이 위에 놓아 물과 기름을 뺀 후 회를 쳐야 좋다고 하였다. 1924년 이용기가 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는 “큰 웅어는 뼈가 거세어 회로 마땅하지 않고 작은 것이 회로 쓰기에 좋다. 머리를 따고 비늘을 긁어 통으로 어슷하게 썬 다음 막걸리에 빨거나 참기름에 무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씹어 먹을 때 입 안에 찌꺼기가 남는 것이 웅어회의 단점이다”라고 하였다.

겸재의 행호관어도
웅어

 

겸재는 양천현감 시절에 행호관어도를 그렸기 때문에 한강 남쪽에서 한강을 관람하였지만 행호를 제대로 볼 수 있으려면 덕양산에 오르면 된다. 행주산성이 있는 곳이 덕양산이다.

행주산성(幸州山城)은 경기도 고양시 행주내동 산 26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 둘레가 약 1km, 면적은 48,570평이며, 사적 제56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행주(幸州)는 한양(漢陽)의 외곽지대로 한강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군사적으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행주산성이 위치한 덕양산(德陽山)은 삼국시대부터 토축(土築) 산성이 있었다. 산성은 해발 124.8m의 덕양산의 해발 70∼100m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山頂式) 산성으로, 남쪽은 한강이 연하여 있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昌陵川)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흘러들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垓字)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산성의 동남쪽과 남쪽 일대는 자연 경사가 매우 급하여 자연적인 요새로서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 산성의 동북방 일대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덕양산 정상에 올라서면 한강 이남 일대는 물론 멀리 북쪽으로는 고양시(高陽市) 일대가 한눈에 보이며, 사방으로 시야가 막힘이 없어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幸州大捷)이 있었던 지역으로 권율(權慄) 장군이 왜군을 맞아 크게 이긴 곳이다. 이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官民)이 일치단결하여 싸웠으며, 특히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 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선조 36년(1603)에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를 세우고, 헌종 때에 기공사(紀功祠)를 세웠으며, 1963년에는 덕양산정에 새로 대첩비가 건립되었다. 1970년에는 행주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 정화작업을 벌여 권율을 모시는 충장사(忠莊祠)를 세우고 정자와 문도 세웠으며, 산책로를 개설하는 등 경역(境域)을 규모 있게 조성하면서, 1845년에 옛 비의 내용을 새로 새겨 세운 행주 기공사 경내의 대첩비를 충장사 옆에 옮겼다. 또한 그 중수기념비(重修記念碑)를 덕양정(德陽亭) 건너편에 세웠다.

강서생태공원 안내센터 4층에서 바라본 덕양산의 행주산성

행주산성 밑에는 옛날에 행주나루가 있었다. 행주나루는 행주산성의 북서쪽 기슭 아래 한강변에 있는 나루터이며,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오래된 민물포구라는 것이다. 과거 행주나루의 정확한 위치는 행주대교 북단 교각에서 상류 쪽으로 400m쯤 떨어진 행주가든 식당 아래 강변의 돌방구지가 있던 백사장이었는데 지금은 수중보 설치로 인한 수면 상승과 개흙 축적으로 옛 모습은 사라졌다. 표석은 고양시의 행주가든 음식점 주차장 입구에 ‘행주나루터’ 표석이 세워져 있지만 서울 강서구에도 ‘행주나루터’ 표석이 있다.

서울 강서구에 설치된 행주나루터 표석에는 “이곳에서 강변 쪽에 있던 행주나루는 강서구 개화동 갯모랭이 마을 앞에 있던 나루터의 이름이다. 행주대교가 놓이기 전에 개화동에서 예전의 고양군(高陽郡) 지도읍(知道邑) 행주리(幸州里)로 건너가는 나루터였다. 갯모랭이는 갯가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강 하류는 인천만의 바닷물이 들어와 섞여지므로 소금기가 있어서 강변이지만 갯가라고 하였다.”고 쓰여 있다.

고양시 행주가든 주차장에 설치된 표석
서울 강서구 개화동 205-42에 설치된 표석

강서생태공원을 걷다보면 행주대교를 지나게 된다. 행주대교 다리 밑에는 자전거를 타는 분들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기도 하다.

행주대교는 강서구 개화동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사이를 연결하는 한강상의 교량이다. 폭 10m, 길이 1,460m의 다리로 1975년 7월 5일 착공하여 1978년 7월 22일 완공하였다. 일명 김포대교라고도 불렀다.

이 다리의 노후화와 교통량 증가로 하류 지역에 사장교(斜張橋) 형태의 신행주대교를 가설하였다. 이 다리는 1992년 7월 공사 중 중앙부 사장교 구간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하여 개통이 지연되어 1995년 5월 20일 준공되었다. 벽산건설 외 2개사가 참여하여 완공하였으며, 규모는 길이 1,460m, 폭 14.5m이다.

이후 계속되는 교통량의 증가로 신행주대교와 구행주대교 사이에 새로운 다리를 가설하게 되었다. 일명 제2신행주대교라고 부르는 이 다리는 1996년 착공하여 2000년 12월 27일에 준공하였다. 다리의 규모는 신행주대교와 같다. 두 개의 다리가 완공됨에 따라 하류 측에 있는 행주대교는 고양시에서 강서구 개화동 방향으로, 상류 쪽에 있는 행주대교는 개화동에서 고양시 방향으로 일방통행하게 되었다. 각 노선은 편도 3차선이다. 1978년에 준공된 구행주대교는 폐쇄되었으며 향후 철거될 예정이다.

판개목에서 찍은 북한산과 행주대교

행주대교를 지나면 방화대교를 맞이하게 된다. 방화대교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과 경기도 고양시 강매동을 연결하는 다리다.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고속국도 제130호)에 건설된 다리며, 서울특별시 입구에 건설된 다리다. 한강을 횡단하는 다리 가운데 27번째로 건설된 교량으로, 특히 중앙부 540m의 아치트러스교는 비행기 이착륙을 형상화한 디자인으로 미관이 뛰어나서 남쪽의 개화산과 북쪽의 행주산성 등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건설의 일환으로 1999년 완공되었다.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민간자본유치촉진법에 따른 제1호 민자유치시설사업으로, 민간 운영사인 신공항하이웨이(주)에서 운영하는 유료도로이다.

총 연장 2,559m의 왕복 4차선 교량이다. 88분기점과 김포 나들목, 노오지 분기점 등에서 고양 방향으로의 진입과 인천 방향에서의 진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천국제공항이나 영종・무의도 방향 이외의 차량은 착오 진입을 유의해야 한다.

방화대교와 행주산성

방화대교를 지나면 바로 투금탄 이야기를 설명해 놓은 안내판을 보게 된다. 방화대교의 남쪽은 서울 강서구 방화동이다. 방화대교 부근의 한강을 투금탄 이야기로 인하여 투금강(投金江)이라고 하였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다. 어느 형제가 함께 길을 가던 중, 아우가 금덩이를 두 개를 주워서 하나를 형에게 주었다. 양천강(지금의 한강 공암나루터, 강서구 가양2동 근처)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형이 이상히 여겨서 물었더니 아우가 대답하기를 “내가 그동안 형을 매우 사랑했는데, 지금 금덩어리를 나누고 보니 갑자기 형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금덩어리는 차라리 강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 낫다고 행각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형도 “네 말이 과연 옳구나!”하고는 동생을 따라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두 형제의 형은 고려 말 〈다정가〉란 시조의 작자로 알려진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이며, 아우는 이억년이다.

〈다정가〉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 하야 잠 못 드러 하노라

투금탄의 일화를 읽는 동안은 재미에 빠져들고, 읽은 후에는 삶의 지혜를 일깨워 주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투금탄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선두를 따라가다 보면 마곡대교를 맞이하게 된다. 마곡대교를 지나기 전에는 전망대도 나오고, 전망대에 올라 한강을 조망해 본다.

마곡대교(麻谷大橋)는 서울 강서구 마곡동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현천동을 잇는 철도교이다. 인천국제공항철도 디지털미디어시티역 - 마곡나루역 구간에 있다. 철도교지만 '철교'가 아닌 '대교'를 사용한다.

총 연장은 2,393m이며 이 중에서 한강을 횡단하는 구간은 1,090m이고 그 외에 강북 접속교 1,010m, 강남 접속교 293m로 구성되어 있다. 한강을 횡단하는 다리 중 네 번째로 건설된 철도 전용 교량으로 도로교와 철도교를 통틀어서 가장 길며, 방화대교와 가양대교 사이에 있다. 2004년 인천국제공항철도 2단계 구간(김포공항역 - 서울역) 공사 당시에 착공하여 2010년 12월 29일에 개통되었다.

마곡대교와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방화대교와 행주산성
전망대에서 바라본 마곡대교와 북한산
대덕산과 한창 건설 중인 덕은지구

마곡대교를 지나면 가양나들목을 만나게 되고, 가양나들목 부근에서는 수상스키를 즐기는 동호인을 볼 수가 있었다. 가양나들목에는 서울 강서구의 궁산이 위치해 있으며 궁산에는 지금도 양천향교가 있다. 궁산은 관산 · 파산 · 성산 · 진산이라고도 하였다.

가양나들목을 지나고 나면 구암나들목이 나온다. 구암나들목 부근에는 옛날에 공암나루가 있었다고 한다. 공암나루(孔岩津)는 서울시계 내에서는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나루로써 강화도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강 건너에는 고양시가 보이고 광주암(廣州岩)이라고 부르는 바위섬이 물 가운데 있어 기이한 풍치를 이루었다고 한다. 나루의 크기가 작아 양화나루 아래 예속되어 있었다. 옛 양천읍(강서구 가양동)의 진산인 궁산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면 동쪽으로는 공암산이 있고, 그 산 아래 물가 모래밭에는 공암(孔岩)이라는 암굴(岩窟)이 있다. 공암나루에 배가 드나들던 모습은 사라졌지만 광주바위를 중심으로 조성된 구암공원이 인접해 있어 문화적 명소가 되어 있다.

광주암(廣州岩)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는데, 전설에 의하면 본래 이 바위들은 광주(廣州)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해인가 커다란 장마에 휩쓸려 현재의 장소에까지 떠내려 왔다. 이것을 기화로 광주의 사또는 해마다 양천(楊川) 사또에게 세 개의 쑥대 빗자루를 세금으로 거두어 갔다. 이 빗자루들은 이 쌍둥이바위에서 저절로 자라난 쑥대로 만든 것이었다.

마침내 이것을 귀찮게 여긴 양천 사또는 언젠가 광주 사또에게 따졌다.

“이보시오, 광주 사또! 이렇게 꼬박꼬박 쑥대 빗자루를 구실로 받아갈 양이면, 아예 이 바위들을 당신의 관할 구역으로 도로 가져가시오!”

말문을 잃은 광주 사또는 다시는 세금을 걷어갈 수 없게 되었고, 그 바위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광주바위’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구암나들목의 구암은 허준의 호에서 따왔다. 구암(龜巖)은 조선시대 『동의보감』, 『언해태산집요』, 『언해구급방』 등을 저술한 의관으로 어의였다. 2005년 3월에 허준박물관이 개관되어 허준과 『동의보감』을 알리는 교육과 전시행사가 있다. 매년 서울 강서구를 중심으로 ‘허준 축제’를 개최하고 있기도 하다.

구암나들목을 지나면 가양대교를 맞이하게 되는데, 가양대교 지나기 전에 전망대에 올라 대덕산과 난지도의 노을공원과 하늘공원을 조망해 본다.

가양대교는 서울 서부지역인 강서구 가양동과 마포구 상암동을 남과 북으로 연결하는 다리로 북단은 강변북로(자유로), 남단은 올림픽대로와 직접 연결된다. 교량 남쪽과 북쪽 끝에 위치한 화곡나들목과 상암나들목을 통해 한강 교량 가운데 동서남북 전방향 진출입이 가능한 유일한 교량이다. 부드러우면서도 단순한 조형미를 위주로 설계되었고 야간조명이 아름다워 2002년 월드컵 때에는 상암월드컵경기장을 찾은 내・외국인들에게 파노라마식 조명을 선보인 곳으로 유명하다.

1994년 12월 착공되어 2002년 5월 31일 완공되었다. 너비는 16∼29m(4차선・6차선), 총 연장 1,700m의 장대교량으로 교각 간 거리가 최저 100m, 최대 180m에 이르러 강상판 상자형교(steel box girder) 양식으로서는 국내에서 가장 긴 교량이다.

가양대교 조망대
가양대교 조망대에서 바라본 난지도와 가양대교
가양대교 조망대에서 바라본 방화대교와 행주산성

가양대교 조망대에서 한강 하류 방향의 방화대교와 행주산성을 감상하고, 한강 건너편의 난지도를 바라본 후, 가양대교를 지나친다.

가양대교 남부

가양대교를 지나고 나면 염강나들목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선두에 걷던 회원이 후미의 회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여의도 방향으로 계속 걷기로 한다. 염강나들목 앞 한강에서도 수상스키를 즐기는 분들이 계셨다. 난지도를 배경으로 수상스키의 달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니 제법 어울려 보인다.

염강나들목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신 회원들

염강나들목에서 약 15분을 천천히 걸으면 염창나들목을 지나게 된다.

염창나들목에서 또 약 5분을 걸으면 안양천 합류지점을 만나게 된다. 안내판에 안양천은 경기도 안양시에서 서울 금천구, 구로구, 양천구, 영등포구를 경유하여 한강으로 흐르는 연장 13.9km의 국가하천으로 대방천, 도림천, 오류천, 시흥천, 대방천 등을 아우르고 있다. 한강은 강남쪽 5개 지천(고덕천, 성내천, 탄천, 반포천, 안양천)과 강북쪽 5개 지천(향동천, 홍제천, 봉원천, 욱천, 중랑천)이 합류되어 서해 바다로 흐르고 있다고 설명해 놓고 있다.

안양천 합류지점에는 많은 자전거 동호인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안양천 합류지점을 지나면 한강 다리 중, 가장 최근에 개통한 월드컵대교를 만나게 된다. 월드컵대교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 증산로와 영등포구 양평동 서부간선도로를 연결하는 길이 1,980m, 너비 31.4m의 왕복 6차로 교량이다. 월드컵대교라는 이름은 2002 한일 월드컵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2010년 4월 29일 착공되었으며, 2021년 9월 1일 정오에 개통하였다. 착공부터 개통까지 만 11년 4개월이 걸려 국내 교량 가운데 최장의 공사 기간을 기록하게 되었다.

월드컵대교는 폭 30.7m, 높이 100m의 경사주탑(경사각 78도)을 지니고 주 경간이 225m인 한강 최초의 비대칭 복합 사장교이다. 이는 향후 경인 아라뱃길(경인운하)를 통과하는 배들이 운항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또한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당간지주, 학과 청송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교량이다. 과거 마포나루 ‘황포돛대’의 향수를 모노타워와 케이블 비대칭 배치로 표현하였다.

월드컵대교에서 약 10분도 안 걸려 성산대교를 맞이하게 된다. 성산대교는 서울 마포구 망원동 450번지와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95번지 사이 한강에 있는 다리이다. 한강 북단의 성산동과 연결되어 성산대교라고 하였다. 1977년 4월 6일 한강교량 공사를 착공한 후, 1980년 6월 30일 폭 27m, 길이 1,040m로 준공되었다.

다리의 모양은 반달형으로 직선미에 동양적 곡선미를 조화시킨 독특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으며, 교량 공사와 함께 다리 양쪽에 입체교차시설을 완벽하게 처리하여 한국 교량 건설사상 신기원을 이룬 작품이다.

성산대교에서 양화대교 사이에는 망원정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걸었던 한강 남안에서는 망원정을 직접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한강의 정자 중에는 역사적으로나 위치적으로나 매우 의미있던 것이었다.

망원정(望遠亭)은 양화나루(楊花津) 서쪽 언덕인 마포구 망원동 137, 207-1번지 일대에 있었다. 태종의 아들이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의 별장으로 세종 6년(1424)에 건립되었다. 이 정자는 처음에는 희우정(喜雨亭)이라 하였는데, 세종 7년(1425) 왕이 농사 형편을 살피러 이 곳에 거둥하였다가 새 정자에 올랐을 때 때마침 기다리던 비가 내려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므로 왕이 매우 기뻐하여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이라 붙인 것이라 한다. 효령대군은 이러한 왕의 행차와 명명(命名)에 깊이 감사하여 부제학(副提學) 신장(申檣)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고, 변계량(卞季良)에게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변계량의 기문과 망원정의 주변 풍광을 노래한 시들에 의하면 정자가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으며, 강변에 매우 가깝게 있고 누각 형식의 건물로 둘레에 난간이 돌려져 있었으며, 주위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울창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가 미상의 희우정 그림을 보면 강가 절벽 암반 위에 덤벙주 초석을 놓고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로서, 마루 둘레에는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을 한 모습이다.

세종 27년(1445) 왕이 이 곳에 거둥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천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포를 발사하며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하게 하였고, 세자와 대군 등이 희우정 서쪽 봉우리에 올라 관람하였다. 따라서 이 부근은 경치 좋은 명소로서만이 아니라 수륙군(水陸軍)의 훈련장으로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종 15년(1484)에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이 정자를 고쳐 짓고 이름을 망원정이라 하였다. 이는 이 정자에 오르면 연희평(延禧坪)의 넓은 들판을 건너 도성 서북쪽의 산악지대를 바라볼 수도 있고, 또 동남쪽으로 한강을 끼고 벌려 있는 산야의 먼 경치를 잘 바라볼 수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성종은 세종 때의 예에 의하여 매년 봄・가을 이 곳에 나와 농사 형편을 시찰하고 또 수전 연습을 관람하였으며 문인 명사들과 시주(詩酒)를 즐기기도 하였다.

그 후 연산군 12년(1506)에는 연산군의 향락행위를 위하여 한강 명소인 망원정을 크게 확장할 것을 명하였다. 이 때 지붕은 초가로 하고 건물은 천 여명이 앉을 만큼 크게 짓게 하며, 정자 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건물은 모두 철거하도록 하였으며, 정자의 이름도 수려정(秀麗亭)으로 고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해 9월 중종반정으로 모든 공사는 중지되고 철거됨에 따라 망원정도 다시 옛 모습으로 명사들이 즐기는 명소가 되었다. 이 곳은 경치가 매우 좋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연회장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잠두봉(蠶頭峰)과 가깝기 때문에 잠두봉을 찾는 길에 이 곳에 들르는 사신도 있었다.

그러나 망원정은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 때에 유실되어 마포구 망원동 동명에서만 그 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그후 서울시에서는 1986년에 한강변 문화유적 복원계획의 일환으로 문헌 고증과 현지 발굴조사를 통해 망원정을 복원하기로 결정하였다. 망원정 복원공사는 1988년 6월 20일부터 1989년 10월 20일까지 시행되었으며, 원래 위치에서 약간 벗어나 마포구 동교로8안길 23 (합정동)에 대지 341.5평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팔작기와집 누각으로 복원되었다. 그리고 1990년에 망원정 터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 보전하고 있다.

월드컵대교에서 양화선착장을 지나면 선유도를 만나게 된다. 선유도는 예전에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에 속한 해발 40미터의 선유봉(仙遊峯)이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선유봉에 대해 “풍경이 빼어나서 뱃놀이를 하던 섬. 현재는 제2한강교 가설로 일부를 허물어버림”이라고 실려 있는데, 한강의 경치 좋은 곳에 서 있는 선유봉은 산의 형국이 고양이 같다 하여 괭이산이라고도 불린다. 70여 년 전만 해도 선유봉의 동・서・남쪽으로는 10만 평이나 되는 넓은 모래밭이 있어서 사람들이 양화리, 양평리 쪽으로 걸어 다녔다고 하며, 서쪽으로는 작은 양화나루가 있어서 한강 건너편 큰 양화나루로 배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일제는 선유봉을 채석장으로 사용하였다. 한강변에 홍수 방지 둑을 쌓고 여의도비행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놓기 위해 1945년까지 선유봉의 절반 이상을 깎아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이번에는 미군들이 인천으로 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 일제와 똑같이 돌을 캐갔다. 1962년에는 군인 출신 윤태일 서울시장이 길이 1,108미터, 너비 13.4미터, 4차선의 제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 건설에 착공하였다. 1968년에 시작된 한강 개발은 선유봉을 결국 섬이 되었다. 선유봉 주변에 7미터 높이의 시멘트 옹벽을 쳤고, 한강제방도로(현 강변북로)를 건설한다며 선유봉 앞 모래를 퍼갔다.

1970년대의 도시화, 공업화에 따라 서울 서남부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1978년 서울시가 선유도에 정수장을 지었는데, 그로 인해 제2한강교의 건설로 겨우 남아 있던 선유봉의 흔적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선유도 주변에는 3만여 평의 모래밭만 남았다가 현재에는 양화대교와 선유교로 뭍과 연결되는 섬 아닌 섬으로, 정수장 시설을 재활용한 생태공원으로 거듭났다.

조선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낸 서명응은 서강과 양화진 일대의 아름다움을 ‘서호십경’으로 읊었는데, 그중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선유봉 아래 물에 비친 달(선봉범월(仙峰汎月))’로 꼽았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명산대천을 찾아다녔던 양녕대군은 말년에 이곳에 ‘영복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한가로운 삶을 즐겼다고 한다. 또한 겸재 정선은 선유봉 부근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선유봉」에는 말을 탄 선비 일행이 줄지어 모래밭을 건너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외에도 「양화환도」, 「소악후월」, 「금성평사」 등에서 선유봉의 수려한 풍경을 그려놓아 옛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다.

선유도의 동쪽에는 양화대교가 지나고 있다. 양화대교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과 영등포구 양평동 사이를 잇는 길이 1,053m, 폭 18m의 구교와 그 상류 측에 세워진 길이 1,053m, 폭 16.1m의 신교를 합친 왕복 8차선 다리이다. 구교는 1962년 6월에 착공해 1965년 1월 25일 준공하였으며, 신교는 1979년 1월에 착공해 1982년 2월 2일 준공하였다. 원래는 구교를 제2한강교라고 하였는데, 1982년 9월 한강종합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 구교와 신교를 합해 지금의 명칭으로 개칭되었다. 이름의 어원은 과거 이 다리 인근에 있었던 한강의 주요 나루터인 양화진에서 따온 것이다. 구교는 8.15 광복 후 한국 기술진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한강 다리다.

제2한강교를 착공할 당시의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교량과 직결하는 도로를 건설하려면 주변의 토지를 매입해야 하는데, 매입 가격을 두고 정부와 토지 소유주 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그런데 토지 소유주 중 하나인 회사의 경영인이 비교적 싼 가격에 팔겠다고 먼저 나서서 나머지 토지 매입도 적당한 가격에 타협이 났다고 한다. 이 경영인이 바로 유일한이었다는 일화다.

구교 개통 당시 다리 북단 입구에는 높이 50m의 대형 조형물이 있었다. 이 탑은 유엔군의 6.25 전쟁 참전을 기념하는 뜻에서 국민 성금을 모아서 만든 철근 콘크리트 형태의 ‘유엔군 자유수호 참전기념탑’이었다. 그러나 이 탑은 양화대교 신교 확장 공사의 영향으로 1981년 철거되었다.

양화대교의 동쪽으로는 당산철교가 있다. 당산철교는 한강의 3번째 철교로 1980년 2월에 착공하고, 1983년 11월에 준공하였다. 1984년 5월 이 구간을 지나는 서울 지하철 2호선이 개통하면서 교량의 열차 운행도 시작되었다. 당시의 교량은 무도상 트러스 철교였는데 특이하게도 상, 하부가 철제 트러스로 되어 있었다.

양화대교와 당산철교 부근의 한강을 옛날에는 양화도(楊花渡)라고 불렸고, 양화도의 한강 북안에 양화진(楊花津)이라는 나루터가 있었다. 양화진(楊花津)은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지역의 한강 북안에 있었던 나루터이다. ‘양화도(楊花渡)’라고도 하였으며 서울에서 양천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시대 주요 간선도로상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조선 초기 바닷물이 용산까지 밀려와 한때는 용산이 으뜸가는 나루였으나 염창의 모래언덕이 조수의 침입을 받아 허물어지고 점차 한강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큰 배가 용산까지 직접 못 들어오자 양화진이 요충이 되어 크게 번창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나루는 경상・전라・충청・경기도에서 올라오는 곡물을 서강 광흥창까지 운반하는 조운(漕運) 항구로서 농산물의 재분배를 담당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고려 이래로 양천・강화를 가려면 반드시 이곳 양화나루를 건너야 했으며, 조선 영조 이후에는 송파진(松坡鎭)・한강진(漢江鎭)과 함께 한강의 삼대 관방으로 요충을 이루었다. 따라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일찍이 어영청에 소속되어 10척의 배를 가지고 순시하였으며, 진을 구축하여 관리들이 파견되어 있었던 곳이다. 이 지역은 한강 가운데서도 가장 경치가 아름답고 정자가 많았던 곳인 반면, 개화기 때 개화사상의 선각자로 널리 알려진 김옥균(金玉均)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고, 천주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유입될 때 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장소로서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곳이다. 오늘날 이곳에는 양화진 순교자기념관이 절두산에 세워져 있어 그 영령들을 기리고 있다.

徐居正(1420∼1488)은 한양의 여러 장소에서 즐길 수 있는 열 곳에 대해 노래한 「漢都十詠」에서 양화답설(楊花踏雪)을 포함시켰다. 양화답설(楊花踏雪)이란 하얀 모래밭이 넓게 펼쳐져 있던 양화진에 흰 눈이 가득 쌓인 눈길을 걷는 정경이 너무 고와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양화진의 한강 상류에는 밤섬이 자리하고 있었고, 밤섬이 자리한 한강을 서강(西江)이라고 불렸다. 서강(西江)은 서호(西湖)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 가장 아름답고 번화한 지역이라고 하였다.

정도전이 조선 태조 7년(1398) 4월에 임금에게 바친 신도팔경(新都八景)에 “사방이 서강에 모여드니, 용같이 날치는 만곡의 배로 나르는 도다. 천창에 붉게 썩는 것을 보려 무나, 정치하는 것은 먹이가 족한 데에 있도다.”라는 ‘서강(西江)의 조박(漕泊)’을 여섯째로 지어 놓았다.

조선 영조 때 대제학까지 지낸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그의 저서 『보만재집(保晚齋集)』 권1에 서호10경을 남겨 놓았다.

01 백석한조(白石旱潮) - 백석에 아침 일찍 오르는 바닷물

02 청계석람(靑谿夕嵐) - 청계산의 저녁에 피어오르는 기운

03 율서우경(栗嶼雨耕) - 밤섬의 비갠 후 밭갈이

04 마포운범(麻浦雲帆) - 마포에 구름처럼 정백해 있는 돛단배

05 조주연류(鳥洲煙柳) - 새섬의 저녁연기와 버들가지

06 학정명사(鶴汀明沙) - 방학다리 아래 밟으면 소리나는 곱고 깨끗한 모래밭

07 선봉범월(仙峯泛月) - 선유봉 아래 물에 비친 달

08 농암관창(籠巖觀漲) - 밤섬 앞에 있던 농바위에 한강물이 넘치는 모습

09 노량어조(鷺梁漁釣) - 노량진에서이 고기잡이와 낚시

10 우잠채초(牛岑採樵) - 와우산에서 땔나무하기

밤섬은 마포구와 여의도 사이의 한강에는 밤처럼 생겼다 하여 붙였던 이름이며, ‘강 가운데 섬’이라는 의미에서 하중도라고도 하였다.

『서울명소고적』에 맑은 모래가 연달아 펼쳐져 한강과 묘하게 서로 어울려 풍치가 빼어났다고 실려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는 율도(栗島, 밤섬)는 마포 남쪽에 있는데 약을 심고 뽕나무를 심는다라고 적혀 있다. 한글학회가 발간한 『한국지명총람』에 “율도동은 서강변에 딸린 행정명으로, 서강 앞 한강 가운데에 있는 밤처럼 생긴 섬이며, 고려 때는 귀양을 가던 곳으로 조선 순조 때까지는 뽕나무를 많이 심던 곳”이라고 실려 있다. 『동국여지비고』 「한성부」 ‘산천’조에서 “율주(栗州)를 밤섬 또는 가산(駕山)이라고 한다. 그 길이가 7리쯤으로 서울 서남쪽 10리 지점, 곧 마포 남쪽에 있다. 나라에서 관리하는 뽕나무밭과 약포는 전의감 소속이다”라고 하였다.

『명종실록』 11년(1556) 4월 초에 “밤섬에서는 친척끼리도 당사자들이 마음만 맞으면 시집도 가고 장가도 든다. 비록 4촌, 5촌 간의 근친이라 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홀아비나 과부가 생기면 따로 혼처를 구하지 않고 동거하는 것을 조금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사방이 강물로 둘러싸서 이웃한 마을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행하는 일이 남의 이목을 끌지 않는 것을 기화로, 깊고 얕은 강물을 건너 섬을 드나들 때면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는 등 음란하기 이를 데 없다.”라고 하여 밤섬의 풍습을 엿볼 수 있다.

마포팔경 중의 하나로 ‘밤섬 주변에 쌓인 깨끗한 백사장의 원경’을 의미하는 율도명사(栗島明沙)를 적혀 놓아 밤섬을 중심으로 주위의 푸른 버드나무 그늘도 좋고 또 물이 섬을 감싸면서 돌아 나가는 사이로 고깃배와 놀잇배들이 한가롭게 떠 있는 모습이 더욱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냈다. 인조 때의 문신 이민구가 지은 시에 “세 갈래 물이 한 쌍 섬을 둘러싸고, 그 가운데로 백로주(白鷺州)를 열었구나. 강물 따라 떠내려가지 않고서 오랜 세월 땅 모양 짓고 떠 있네.”라는 시구로 봐서 밤섬은 원래 두 개의 섬으로 되어 있고, 그 사이로 강물이 흘러서 세 갈래로 흐르는 한강이 더욱 아름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가 된 것은 한강 개발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여의도보다도 더 큰 섬이었지만 경제 개발의 여파 속에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한강에서 가장 아름다웠다고 하였던 서강은 현재에 와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더 특별해 보이진 않는다. 이제는 서강의 위치도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되었고, 서강이라는 명칭의 단어도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서강대교로 서강의 위치와 명칭의 사용으로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서강대교는 마포구 신정동과 영등포구 여의도동을 연결하는 한강상의 교량이다. 다리 이름은 조선시대 이 부근의 한강을 서강이라고 부른 데서 연유되었다. 1980년 2월 착공되었으나 ’88서울올림픽 준비와 막대한 공사비로 10년 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93년 공사를 재개하여 1996년 12월 30일 개통되었다.

교량의 폭은 29m이며, 길이는 1,320m이다. 강북의 신촌지역과 강남의 여의도를 연결하는 다리로 수원 · 인천방향으로 이어지는 동맥이며, 경인고속도로와도 연결되어 여의도를 3분할하는 효과를 갖고 있다. 이 다리가 놓인 지역은 강폭이 넓고 양안에는 고층건물과 주택이 들어서 있으며, 한강 중간에 밤섬을 지나게 되어 주변 경관과 어울리는 형태의 닐슨 아치(Nielsen Arch)교로 건설되었다.

서강의 한강 상류는 마포나루가 위치해 있고, 마포나루가 위치한 한강을 옛날에는 마포강(麻浦江)이라 불렸다 한다. 마포강은 마호(麻湖)라고도 한다.

마포나루(麻浦津)는 ≪동국여지비고≫에 마포에서 도성 서쪽 15리 지점에 있는 서강까지를 물이 잔잔한 호수 같다고 하여 서호라고 하였으며, 마호 · 삼호라고도 하였다. 삼호는 ‘마(麻)’자의 우리말 ‘삼’의 뜻이기도 하지만, 용산강과 양화진을 함께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삼개나루라고도 하였다. 마포구 마포동 한강 강안에 있던 나루터로서, 마포나루의 강 건너 여의도는 백사장이었다. 이 백사장을 지나 시흥으로 가는 길이 연결되었다. 마포는 용산강 하류에 있는 포구로서, 서울 남서쪽의 운수교통량이 많은 5강 중의 하나였다. 이곳에는 삼남지방의 곡식과 새우젓 등 젓갈류의 집산으로 유명하였다. 또한 이곳은 각지에 연결되어 있는 동막과 더불어 번성하였으나 육로 교통의 발달로 차츰 쇠퇴하였다. 이 부근에는 소금배가 자주 왕래하여 이를 매매하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염리동이 생기기도 하였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동명연혁고』의 「마포구」편에는 ‘마포 새우젓장수, 왕십리 미나리장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조선시대에 구전하는 이야기로, 목덜미가 까맣게 탄 사람을 왕십리 미나리장수라 하였고 얼굴이 까맣게 탄 사람을 마포 새우젓장수라 하였다. 그 이유는 왕십리에서 아침에 도성 안으로 미나리를 팔러 오려면 아침 햇볕을 등에 지고 와 목덜미가 햇볕에 탔기 때문이고, 마포에서 아침에 도성 안으로 새우젓을 팔러 오려면 아침 햇볕을 앞으로 안고 와 얼굴이 햇볕에 새까맣게 탔기 때문이다.

徐居正(1420∼1488)은 한양의 여러 장소에서 즐길 수 있는 열 곳에 대해 노래한 「漢都十詠」에 마포범주(麻浦泛舟)가 있다. 마포범주(麻浦泛舟)는 마포에 배 띄어진 모습이라는 의미다.

마포의 아름다운 모습을 8개로 표현해 놓은 마포팔경이 있는데, 지금은 8개 중에서 3개 만 볼 수 있다니 아쉽기만 하다.

01 용호제월(龍虎霽月) - 용산강에 비 개인 날 저녁에 뜬달 광경

02 마포귀범 (麻浦歸帆) - 삼개나루로 돌아오는 수많은 돛단배의 경치

03 방학어화 (放鶴漁火) - 방학교 부근의 샛강에서 밤낚시 하는 등불 원경

04 율도명사 (栗島明沙) - 밤섬 주변에 쌓인 깨끗한 백사장의 원경

05 농암모연(籠岩暮煙) - 농바위 부근의 많은 인가에서 저녁 짓는 연기 오르는 경관

06 우산목적 (牛山牧笛) - 와우산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목동들의 피리소리

07 양진낙조(楊津落照) - 양화진 강 하늘에 붉게 물든 낙조와 노을의 장엄한 경치

08 관악청참(冠岳晴嵐) - 관악산에 맑게 개인 날 어른거리며 오르는 아지랑이의 신비로운 원경

지금은 마포나루를 볼 수 없지만 그 자리에 마포대교가 설치해 있다. 마포대교는 서울 마포구 용강동과 영등포구 여의도동을 잇는 길이 1,390m, 너비 45.5m의 왕복 10차선 다리이다. 한남대교에 이어 한강에 4번째로 가설된 교량이다. 1968년 2월에 착공하여 1970년 5월에 준공되었다. 교통량의 증가와 기존 교량의 노후로 2000년 7월 하류측에 왕복 6차선의 신마포대교를 준공한 후 기존 교량을 철거하고 다시 세운 후 2005년 10월 18일 왕복 10차선 다리로 최종 개통되었다. 준공 당시는 ‘서울대교’라고 부르다가 1984년에 마포대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마포대교는 2010년 이후 서울 시내 주요 한강 다리 중 투신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 기록을 가지고 있는 다리이기도 하다.

마포의 한강 건너 남쪽 방향에는 여의도가 있다. 여의도는 고려시대에 죄인을 쫓아 보냈던 귀양지로, 배로 건너야 했던 모래섬이었으며, 작은 샛강을 사이에 두고 영등포와 떨어져 있는 한강 가운데의 섬이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옛날엔 연희면 여의도라고 하였고, 다시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汝栗里)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여의도라고 함. 예전에는 연병장, 지금은 비행장으로 쓰이는 한강의 삼각주로 된 섬”이라고 실려 있다.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회장은 “여의도는 옛날에 한자로 잉화도(仍火島), 나의주(羅衣洲)라고도 적었는데, 이를 고유어로 풀면 ‘너(나)벌(불)섬’, ‘너섬’으로 추정할 수 있다”라며 “너벌섬은 ‘너른 모래벌판 섬’으로 해석된다.”라고 밝혔다. 여의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은 별로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잉화도(여의도)는 서강 남쪽에 있고 목축장이 있다. 사축서와 전생서의 관원 한 명씩을 보내 목축을 감독한다”라고 실려 있다. 조선 초기부터 이곳이 말이나 양, 염소 등을 기르는 국립 목축장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양말산이라는 이름도 목축장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여의도는 1916년에 간이 비행장을 만들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김포비행장이 1936년에 건설된 후에도 여의도비행장은 그대로 존속되었고 1945년 광복 후에는 미군이 사용하였다. 1968년 밤섬의 돌과 흙, 여의도 모래톱의 모래를 가져다 높이 16미터, 둘레 7.6킬로미터의 둑을 쌓고 110일 만에 그 안쪽에 87만여 평의 ‘새 여의도’를 만들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여의도에 개발의 문이 활짝 열리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여의도는 한국의 정치, 경제, 언론,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하루 활동 인구가 50만 명에 이르고 국회의사당, KBS, 증권거래소 등의 건물들이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듯 우뚝 서있다.

우리는 아라한강갑문에서 출발하여 약 4시간 30분 동안 걸은 후에야 여의교에 도착하였다. 여의교는 영등포구 여의도동 48번지와 신길제7동 1351번지 사이 여의도샛강에 있는 다리이다. 다리 이름이 여의도의 지명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여의도교라고도 한다. 원효대교를 통해 여의도를 거쳐 영등포지역과 직결되는 도로를 개설하면서 1976년 11월 15일 미룡건설에 의해 폭 18m, 길이 240m로 준공되었다. 그 후 1990년 10월 19일 동부건설에 의해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다.

여의교

참석 회원께서 오래간만에 아스팔트 길을 걸었기 때문인지 빨리 지치고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결국 회원 간의 합의로 최초이 목적지인 반포대교까지 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어 여의교에 위치한 대방역까지 걷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대방역 근처의 맛집인 약촌마을에서 삼계탕으로 식도락을 즐겼다. 이번 주 한강나루길 1회차에 이정일 고문께서 석식을 후원해 주셨다.

이정일 고문님!

약초가 듬뿍 들어간 삼계탕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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