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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인산악회

[1923회] 우면산 산행기

by 출판N산악 2022.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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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우면산 산행기

 

산행 코스 : 선바위역(4호선) 2번 출입구 우면산 들머리 - 헬기장 공군부대 소망탑 대성사 예술의 전당 양재역 영동족발 - 양재역

 

산행 일시 : 20201031일 오후 130오후 520(3시간 50분 산행)

날씨 현황(서울 서초구 서초3) : 맑음. 온도(918)

 

참석 인원 : 김현호, 박경미, 박성원, 박연, 부길만, 오상환, 이정수, 최태경, 허영심 (9)

안내자 : 오상환

 

​◆ 상세시간

13:30 선바위역(4호선) 2번 출입구

13:35 우면산 들머리. 우면산 정상 3.9km

13:40 이정표. 우면산 정상 3.5km

13:42 등산복 정리

13:50 13:55 첫 번째 휴식

14:07 이정표. 우면산 정상 2.7km

14:08 - 8분 돌무덤 9분 데코 휴식처 10분 전투진지

14:14 헬기장. 관악산 전경.

14:16 굴곡진 나무

14:20 이정표. 선바위역 1,150km. 돌무덤

14:22 13:35 능선 원형 의자 휴식처. 남산의 모습이 나무사이로 보인다.

14:39 경기도 과천시와 서울시 서초구 갈림길. 선바위역 1,300m. 한국지점번호 다사 5585 4100

14:44 관악산 전경

14:48 14:58 두 번째 휴식

15:03 체육시설

15:05 이정표. 소망탑 770m. 한국지점번호 다사 5629 4148

15:08 V자형 계단길

15:18 가을날의 전형적인 풍경의 등산로에 떨어진 낙엽

15:23 소망탑으로 향하는 계단길

15:25 14:43 소망탑. 한국지점번호 다사 5695 4166

15:46 소망탑 150m. 한국지점번호 다사 5705 4163

15:56 소망탑 450m

15:58 소망탑 470m

16:05 대성사. 소망탑 1.0km

16:10 16:20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동캠퍼스 옥상에서 세 번째 휴식.

16:35 예술의 전당 구름다리. 은행나무와 가로수길

17:00 양재역

17:15 합류

17:30 18:40 영동족발 3호점(0507-1426-0250)

18:45 19:33 공차 양재역점(허영심, 부길만, 박성원)

19:35 양재역 탑승 해산.

 

1. 우면산 소개

우면산(牛眠山)은 서울특별시 서초구의 서초동-방배동-양재동-우면동 및 경기도 과천시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고도 293m이다. 산의 모양이 소가 자고 있는 모양이라 하여 우면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갓바위가 있는 산이라 하여 '관암산(冠岩山)', 산이 도마와 같이 생겨서 붙여진 '도마산', 옛날에 활을 쏘던 사정이 있던 곳으로 '사정산(射亭山)', 수정이 채굴되었다 하여 '수정봉(水晶峰)', 조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태를 묻은 산이라 하여 '태봉(胎峰)'이라고도 한다원래는 삼성산처럼 관악산의 일부였지만, 일본이 1930년에 남태령 고개를 확장하면서 관악산에서 떨어져 나왔다.

 

우면산의 남쪽 기슭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인 지석묘가 있으며, 20여 개소의 약수터 및 대성사라는 사찰, 그리고 정도전의 묘, 이존오의 사당 같은 문화 유적이 있다.

 

태봉의 유래가 된 월산대군 이정 태실(月山大君 李婷 胎室)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고 있다월산대군 이정(李婷) 태실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291-1 태봉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태실'이란 왕가에 출산이 있을 때 왕족의 태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운 곳을 의미하며, 태봉(胎封)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임시로 설치하여 이 일을 맡게 하였다. 월산대군 이정(1454~1488)은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으로, 덕종(德宗)의 맏아들이며, 성종의 형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월산대군은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궁궐에서 자랐다. 7세 때인 1460(세조 6) 월산군에 봉해졌고, 1468(예종 즉위년) 동생인 잘산군(乽山君: 성종)과 함께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임명되었다. 1471(성종 2) 월산대군으로 봉해졌고, 같은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봉되어 전지(田地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이후 그는 서호(西湖)의 경치 좋은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 위치한 희우정(喜雨亭)을 개축하고, 망원정(望遠亭)이라 하여 서적을 쌓아두고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생활을 지속하였다. 1473년 조정에서 덕종을 추존하고 종묘에 부묘(祔廟)하기 이전에는 월산대군이 별묘를 세우고 봉사(奉祀)하여 덕종의 맏아들로서 역할을 다 하였다. 그 뒤 어머니인 덕종 비 인수왕후(仁粹王后)의 신병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병들어 35세로 죽었으며,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종학(宗學)에 들어가 배웠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하였다. 성품은 침착, 결백하고,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였으며,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시문 여러 편이속동문선 續東文選)에 실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저서로는 풍월정집이 있고 시호는 성종이 특별히 '효문(孝文)'으로 내렸다. 월산대군의 태를 묻어 보관하던 태실에는 현재 태비 1기와 석함 1기가 남아 있다. 태비(胎碑)는 전체적으로는 규수방부형(圭首方趺形)으로 비 몸돌과 비 받침이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 앞면에는 월산군정태실(月山君婷胎室)’이라고 새겨져 있고, 비 뒷면에는 천순육년오월십팔일입석(天順六年五月十八日立石)’이라고 새겨져 있어 이 비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월산군(月山君)으로 봉해진 해(1460)로부터 2년 뒤인 1462년 조성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석함(石函)은 상부가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는데, 원래는 석함 안에 태를 봉안하는 태항아리와 지석이 남아 있어야 하지만, 태항아리와 지석은 현재 일본의 아타카(安宅)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반출시기는 알 수 없다. 이 태실은 조선 성종의 형이자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의 태를 묻은 태실로, 비록 태항아리와 지석(誌石)은 도굴되어 남아 있지 않지만, 오늘날 서울지역에서 원위치에 원형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태실이고, ()를 신성시하여 명당을 골라 소중히 모셨던 조선 왕실의 안태(安胎) 의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태실 보호를 위해 민간인의 경작이나 땔감하기, 약초나 나물 캐기 등이 엄격히 금지되었던 금표(禁標) 구역으로 추정되는 태봉산 전체15,249.9를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동 태실 주변의 역사문화적 환경을 보존하고자 한다.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3,00300000,11&pageNo=1_1_1_0)

 

정도전의 묘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도전은 참형의 형벌이 집행되었다. 하지만 이후 정도전의 묘는 이후 실전되어 행방이 묘연했는데, 그나마 정도전 선생의 묘와 관련한 기록은 반계 유형원이 저술한 전국지리지인 동국여지지과천현 편에 정도전 선생의 묘가 재현동십팔리/양재역재동십오리(在縣東十八里/良才驛在東十五里)’에 있다고 적고 있다.

과천현의 관아는 중앙동행정복지센터 자리로, 현재 객사 건물인 온온사(穩穩舍)가 과천시 관문동 107-5번지로 이전, 복원되어 있다. 또한 기록에 언급된 양재역(良才驛) 터는 지금의 양재역 11번 출구 부근에 옛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즉 과천현의 관아 터와 양재역 터를 기준으로, 동국여지지의 기록에 언급된 정도전 선생의 묘는 우면산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실제 지난 1989년 한양대학교에서 해당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된 바 있는데, 머리만 있는 유골이 확인된 바 있다. 특히 태조실록에 언급된 정도전의 사인, 즉 참형의 형태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정도전의 묘일 가능성이 높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피장자의 신분을 확인해줄 지석이 확인되지 않았기에 정도전의 묘일 가능성은 높지만, 확정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한편 지난 2013년 서초구청에서는 정도전의 묘로 추정되는 곳에서 멀지 않은 양재고등학교 정문 쪽에 정도전 선생의 산소 터 표석을 세웠다.

현재 정도전의 묘와 관련한 흔적은 양재고등학교 정문에 있는 산소 터 표석과 평택 문헌사 인근에 조성된 가묘 등이 남아 있다. (https://blog.naver.com/seo8587/222101867294)

 

2. 우면산 산행의 의미

우면산은 서울에서 땅값이 제일 비싸다는 서울 강남에 위치한 산이다. 가격으로 환산하면 서울의 어느 산보다 가장 비싼 산이어서 나의 발걸음 또한 비싸게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우면산의 높이가 293m여서 산악회에서의 전문 산악을 위한 등산보다는 근교 주민의 건강과 레저 또는 산책을 위한 산으로 더 특색이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본 한국출판인산악회에서 몇 년에 한 번 정도로 선호가 낮은 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산은 그 산만이 보유하고 있는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의미가 있다.

우면산의 정상에 오르면 서울 강남 특히 서초구의 전 지역을 볼 수 있었고, 가을날의 맑은 날씨로 남산과 북한산까지 볼 수 있었다. 게다가 2020년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설치 등 검찰개혁이라는 과제로 과열된 법무부와 대검찰청의 갈등은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한 해이다. 검찰개혁의 중심에 서있는 대검철청,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을 유난히도 크게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상대 대상인 대법원과 서울중앙지방법원도 유난히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유일한 산이기도 하다.

200416일에 개통한 우면산 터널201673일에 개통한 서초 터널이 우면산 밑으로 지나가게 되어 편하게 잠을 자야하는 할 우면산 소가 이제는 시끄러워 잘 수 없는 지경에 빠진 것 같아 우면산을 보호해야 입장에서는 미안한 마음도 든다.

 

3. 우면산 산행기

우면산은 2020년 처음으로 산행하는 곳이다. 고참 회원에게 여쭤보니 오래간만에 산행하는 코스라는 것이다. 고도가 293m여서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산행 시간은 약 3시간에서 5시간까지 조절이 가능한 산이기도 하다.

이정일 고문께서는 오후의 개인 일정으로 인해 오전에 우면산 산행을 하신 후, 선바위역 2번 출입구에서 만남시간보다 일찍 회원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 오늘의 산행 시간을 약 4시간에 해당하는 코스로 상세하게 설명하신 후, 입구까지 친절하게 안내도 해 주신다. 내려오면서 체험했던 코스의 자연환경 분위기를 덧붙여 말씀해 주시어 출발하기 전에 이미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신다.

이번 산행의 안내자인 오상환 부회장께서는 이미 우면산 산행 코스에 대해 사전지식을 습득하셨겠지만 이정일 고문의 설명을 한 번 더 숙지하신다. 오부회장의 노력과 안내로 이번 주 산행은 즐거움과 만족지수가 더욱 높아지리라 믿게 된다.

이번 주 산행은 되돌아보면, 특이한 사연이 있었다. 지난 주 관악산을 산행한 후, 과천 방향 남태평고개로 내려와 선바위역에서 해산한 바 있었다. 이번 주는 선바위역에서 시작하는 우면산 산행이다. 지난 주의 관악산과 이번 주의 우면산이 연속되는 우연의 일치가 즐거운 산행으로 이어지는 산이 되었던 것이다.

 

오후 130, 선바위역 2번 출입구에서 우면산 정상을 향해 출발한다.

선바위역. 수도권 전철 4호선 435번이고 1994년 4월 1일 보통역으로 개통한 경기도 과천시 중앙로 지하 440(과천동) 소재의 역이다. 역명은 서있는 바위'라는 뜻의 자연지명인 선바위를 한자로 음차해서 '선암역'이라 하려 했지만 이보다 2년 앞서 울산에서 동해남부선 선암역이 개업했기 때문에 혼동을 우려하여 원래 순우리말 이름인 선바위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선바위역 4번 출입구 쪽에 서있는 흰색 바위가 있다. 현재 있는 바위는 원조 선바위는 아니고, 원래 인근 양재천 시냇가 한가운데 서있던 선바위가 없어져서 가장 비슷한 바위를 섭외하여 세워둔 것이다. 이 역과 남태령역 사이에는 절연구간이 존재한다. 이 역 출발과 동시에 당고개 방면 열차는 80~90km까지 최대한 가속해서 절연구간과 X형 교차터널​을 넘어서 남태령역에 도착한다. 이 역부터 오이도역까지는 한국철도공사 관할 구간이다. 정확히는 선바위역~금정역은 과천선, 금정역~오이도역은 안산선이다.

 

 

오후 135, 선바위역 3번 출입구에서 마을 안으로 약 5분을 걸어 올라가니 우면산 정상으로 향하는 이정표가 나온다. 우면산 정상까지 3.9km이다. 시간으로 보면 약 3시간이 소요되리라 예상한다.

우면산 들머리

 

오후 140, 우면산 정상 3.5km인 이정표를 만난다.

오후 142, 선바위역에서 쉬지 않고 올라오니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라 가만히 서있으면 덥지 않지만 걸으면 더워 등산복 안으로 땀이 맺힌다. 이곳에서 덧옷을 벗기도 하고, 등산복을 정리한다.

가을의 전형적인 날씨에 나무는 노랗게 물들었고, 억새는 더욱 희게 보인다.

 

오후 150, 첫 쉼터의 한가한 담소는 심적인 여유로움이 더욱 묻어나고, 간식은 더욱 맛이 난다.

 

오후 27, 이정표가 보인다. 우면산 정상까지 2.7km. 우면산 들머리에서 1.2km 걸어 휴식 포함 37분만에 올라왔지만 힘들기보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의 가을날 정취에 흥이 저절로 올라온다. 이곳에서 본인을 포함하여 김현호, 부길만 3인이 선두에 서게 되었다.

 

오후 28분에는 돌두덤, 9분에는 전투진지를 데코로 덮어놓은 데코 휴식처, 10분에은 전투진지를 지난다.

 

오후 214, 헬기장에 도착했다. 이곳에 도착하니 등산객 한 분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잠시 오침에 빠진 듯 하다. 실례될까 염려되어 사진은 찍지 못하고 대신 관악산의 연주대를 찍어 놓았다. 우면산 능선에서 바라본 관악산도 가을날의 정경과 함께 아름답게 보인다.

 

오후 216, 낙엽이 다 떨어져 앙상하면서도 부드럽게 휘어진 나무가 보여 사진을 찍었다. 어느 조경 전문가가 잘 조경해 놓고 이 산에 옮겨 심은 듯 예술적이 가미된 나무였다.

 

오후 220, 본인을 포함하여 김현호, 부길만 3인은 서울 전경이 보이리라 예상되는 능선을 향해 거친 숨을 쉬며 올라갔다. 이정표에는 우면산 정상의 거리 표기가 없고 선바위역 1,150m를 표기해 놓았다. 자그마한 돌이 많아서인지 돌무덤을 이루어 놓은 능선길을 계속 올라간다.

 

오후 222, 원형 의자로 만들어 놓은 곳에 이르러 휴식을 취하며 후미의 회원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부길만 교수께서 준비해 오신 배 과일은 단맛이 꿀과 진배없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후미를 기다리는데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곁으로 올라오는 등산객에 후미 회원의 행색을 설명하고 보았냐고 물어보니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서울 남산의 멋진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두고 다른 길로 올라갔으리라 예상되어 빠른 걸음으로 우면산 정상을 향해 오른다.

 

오후 239, 경기도 과천시와 서울시 서초구 갈림길을 지난다. 이곳의 이정표로 선바위역에서 1,300m 올라왔던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지점번호 다사 5585 4100

 

오후 244, 조그마한 능선의 전망대에 오른다. 후미 회원이 먼저 갔으리라 예상하고 빠른 발걸음으로 오르지만 관악산의 전경 또한 놓칠 수 없어 사진으로만 찍고 바로 올라간다.

 

오후 248, 드디어 후미 회원을 만났다. 아니 우리 3인은 오히려 후미가 되어 있어 선두 회원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제 모든 회원이 합류하니 그 즐거움은 배로 증가되는 듯 하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단체사진을 찍은 후, 우면산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

 

오후 33, 부대 옆으로 내려오니 주민을 위해 잘 갖추어 놓은 체육시설을 지난다.

 

오후 35, 이정표을 보니 소망탑(우면산 정상)770m 남았단다. 이 길은 마을 주민들이 많이 다녔다는 것을 한 눈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오후 38, V자형 계단길을 지난다. 매우 특이한 길이기에 한 컷 남겨놓는다.

 

오후 318, 소망탑을 향하는 길은 전형적인 가을날의 풍경이 물씬 풍겨온다. 이 길에 떨어진 낙엽으로 짙어진 가을을 만끽한다.

 

오후 323, 소망탑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길이 나온다. 이 계단을 오르지 전에 힘든 코스가 없어서인지 쉬지 않고 한 번에 올라온다.

 

오후 325, 드디어 소망탑에 도착한다. 항상 정상에 오르면 느끼듯 여기에서도 희열과 행복이 느껴진다. 게다가 서울 강남의 전 지역을 바라볼 수 있는 확 트인 전망이라 가슴이 환해진다. 소망탑에서의 전망은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로 정점을 찍는다. 서울 지역을 전망하면서 나누는 담소는 행복감을 더욱 증대시킨다. 간식하며 휴식을 취하는 예쁜 여학생에게 단체사진은 부탁하니 기꺼이 응해준다. 그래서 그런지 단체사진은 더 예쁘게 나온 것 같다.

청계산
예술의 전당에 대한 설명은 나무위키를 참조한다.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에 마땅한 문화공간이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실제로 당시 서울의 그럴싸한 문화예술 공간은 고작해야 세종문화회관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땅값 싸고 조용한 우면산 중턱 즈음에 예술의 전당을 짓게 된 것이다. 지금이나 서초동-방배동 일대가 번잡한 빌딩숲이 되었지, 과거에는 정말 별 볼일 없는 동네였다. 예술의 전당 건립을 위한 최초의 논의는 1982년 문공부가 주도했다. 당시 민족문화예술의 진흥,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을 위한 토대를 구축하고 국민들에게 문화예술을 향유할 기회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시대적 정치적 필요에 의해 1984년 1월 15일 서초구 우면산 일대에 착공했으며 1986년 12월 24일 재단법인 예술의 전당이 설립되었다. 예술의 전당 건립 공사는 예산 문제로 1단계(84년~88년), 2단계(88년~93년)로 나누어 진행했다. 개관순서를 보면 음악당과 서울서예박물관을 개관하였고(1988년), 이어서 한가람미술관과 예술자료관을 개관(1990년)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오페라하우스(1993년)에 이르기까지 단계별 개관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대형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까지 CJ토월극장, IBK챔버홀, 서울서예박물관 등 노후시설 리모델링과 시설확충에 힘쓰고 있다. 「민법」제32조에 근거하여 설립된 후 「문화예술진흥법」제23조의2(현행 제37조)에 근거를 두고 특수법인으로 전환된 예술의전당은 예술의전당 시설운영, 공연 및 작품전시 활동과 그 보급, 문화예술 관계 자료의 수집 관리 보급과 조사 연구, 문화예술의 국내외 교류사업, 국립예술단체와 협력, 후원회 운영 등을 통한 문화예술의 창달과 국민의 문화 향수 기회 확대를 위한 각종 사업을 주요 업무로 한다. 국내 문화예술의 본진답게 같은 울타리 안에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 국립현대무용단, 국립합창단,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상주중이며 서울예술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한국문화예술연합회도 입주해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국립국악원도 바로 근처에 있다.

 

 

오후 343, 이제 하산길이다. 오상환 안내자는 이정일 고문께서 말씀하신 코스로 선두에 서서 앞으로 나아간다. 본인과 최태경 고문 2인은 후미로 선두가 나아간 방향으로 쫓아간다.

 

오후 346, 소망탑에서 150m 걸었다는 이정표가 나온다. 한국지점번호 다사 5705 4163

 

오후 356분에 소망탑에서 450m, 58분에는 소망탑에서 470m를 걸었다는 이정표를 지난다. 선두의 박연 회원과 오상환 안내자의 전화에서 최태경 고문의 머리 어지럼증으로 천천히 내려가고 있으며, 선두는 계획대로 진행하시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본인과 최고문은 예술의 전당 방향으로 내려간 후, 양재역에서 회원과 합류하기로 한다.

 

오후 45, 대성사에 도착한다. 소망탑에서 1.0km를 내려온 것이다.

대성사(大聖寺) -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삼국사기(三國史記) 제 24권 백제본기(百濟本記) 제 15대 침류대왕(枕流大王)편에 이르시기를 침류대왕 원년인 갑신년[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9년(九年)]인 서기 384년 9월에 서역 천축 인도의 마라난타(摩羅難陀) 대사께서 중국 동진을 거쳐 해동 백제의 서울인 한주(漢州)에 이르렀으므로 침류대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마라난타 대사를 친히 환영하여 궁중에 모시고 극진한 예로써 공경하였는데 백제에는 불법(佛法)이 이로부터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다음해 을유년인 서기 385년 2월에 광주(廣州)인 한산(漢山)에 절을 창건하고 득도(得道)한 승려(僧侶)가 십인(十人)이라 하였으니 백제불교 승가생활(僧伽生活)의 시초라 하겠다. 백제본기에 이르시기를 제 15대 침류대왕이 즉위한 갑신년(동진 효무제 태원 9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진나라로부터 오시니 맞이하여 궁중에 모시고 예로써 공경하였다. 이듬해인 을유년에 새 도읍지 한산주에 불사를 창건하고 득도한 스님이 열 분이시었으니 이는 백제불교의 시초라 하겠다. 백제불교 초전법륜성지 우면산 대성사 사적진언에 의하면 「예로부터 한강 북녘 남산인 목멱산(木覓山)과 한강 남녘인 이곳 대성사(大聖寺)가 위치한 우면산(牛眠山)은 소남소녀(小男小女)의 형국을 지어 이 생기에서 약수가 흘러나와 두 줄기의 생명수를 이루었다. 마침 마라난타 대사께서는 서역 천축 인도와 동토 중국을 거쳐 해동의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시다가 수토병(水土病)으로 크게 고생하시게 되었다. 이에 생명수를 찾아 우면산 기슭에 대성초당(大聖草堂)을 세우고 이 생명수를 드시어 수토병을 고치셨다」한다. 그러하기에 우면산 대성초당은 백제불교(百濟佛敎) 초전법륜성지(初傳法輪聖地)가 되었다. 대성초당지(大聖草堂地)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3동 산 140번지 일대를 말한다. 또 근세에 있어 선(禪)과 교(敎)와 율(律)에 가장 밝으신 대선지식(大善知識)이며 경(經)·율(律)·론(論) 삼장(三藏)의 번역 내지 저술에 이바지한 온 겨레 전 인류 만 중생을 위한 자비 보살이신 석가여래부촉법 제 68세 용성진종(龍城震鍾)대사께서 대각응세 경술년 서기 1910년 경술국치의 치욕에 의해 지리산 쌍계사 칠불암(七佛庵) 칠불선원(七佛禪院) 조실로 계시다가 이곳 백제불교 초전법륜성지인 서울 서초동 우면산 대성초당에 주석하셨다. (http://www.daeseongsa.org/bbs/content.php?co_id=1020)

 

 

오후 410,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동캠퍼스 옥상에 도착하여 노랗고 붉게 물든 우면산의 가을풍경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감상에 젖어본다. 산은 언제든지 우리를 반겨주고, 우리의 고된 심신을 케어해주며, 우리의 삶에 질적인 행복을 더해준다. 우리가 산에서 얻는 것이 많듯 우리도 산에 무엇인가를 줘야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이 어떨지 나부터 노력해야겠다. 10여분 동안 심신의 여유로움을 찾은 후, 양재역으로 향한다.

 

오후 435, 예술의 전당 구름다리를 지난다. 오늘따라 더욱 예쁘게 보이는 것은 노랗고 빨간 나뭇잎의 조명이 더욱 선명해서일 것이다.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지나가는 가수로길은 부드러우면서도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단지 가을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후 515, 선두 회원과 양재역 사거리에서 합류한다. 회원의 얼굴과 유쾌한 발걸음을 보니 우면산 산행의 만족감이 충만해 있는 듯 하다. 회원들께서는 소망탑에서 말죽거리 근린공원 동산을 산행하였기 때문에 만족감이 더욱 증가되었을 것이다. 관문사에서 들러 찍은 사진을 게재해 놓는다.

 

오후 530, 양재역에 가면 반드시 찾아가는 우리의 단골집인 영동족발 3호점지하식당으로 내려간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QR코드를 찍거나 수기로 방문기록을 작성하여 우리의 행적을 밝힌다. 오상환 안내자의 건배사와 부길만 교수의 저녁 후원에 따른 회원의 감사 박수로 분위기는 고조되고, 최태경 고문의 마지막 덕담으로 우면산 산행의 회식은 즐거움으로 마무리 한다.

 

오후 640, 양재역에서 회원들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행로로 직행한다. 이른 저녁식사를 해서인지 조금 부족하고 아쉬움이 남는다고 느낀 순간, 허영심 회원이 차 한 잔하자는 말에 본인은 무조건 “OK”한다.

 

오후 645, 본인을 포함하여 허영심 회원과 부길만 교수 등 3인은 공차 양재역점에 들러 심신의 모든 긴장을 내려놓은 한담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오후 733, 양재역 5번 출입구로 들어서서 본인과 허영심 회원은 지하철 3호선을 부길만 교수는 분당선을 탑승함으로써 오늘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 한다. 본인은 원흥역에서 허영심 회원은 화정역에서 하차해야 함으로 함께 지하철을 동승하였다.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솔직 담백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허영심 회원과는 처음으로 이렇게 진솔한 대화를 나누니 심적인 관계는 더욱 가까워진 듯 하였다. 끝없고 재미있는 대화는 본인이 내려야 할 원흥역에 도착해서야 그치게 되었다. 아쉬움은 다음에 만회하는 것으로 기약해야만 했다.

양재역. 수도권 전철 3호선 342번, 신분당선 D08번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지하 2585 (서초동) 소재한 역이다. 1983년 9월 13일에 양재역으로 역명 결정하였고, 1985년 10월 18일에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양재 구간 개통과 함께 영업 개시하였으며, 2011년 10월 28일에 신분당선 개통과 함께 환승역이 되었다. 역명의 모티브는 과거 조선 시대에 말을 대기시켜 놓던 동명의 역에서 따 왔다. 그 역으로 인해 일대에 말죽거리라는 별칭이 붙은 곳이기도 하다. (역 밖에 이를 알리는 표석이 있다.) 병기역명은 서초구청. 을사사화 이후 있었던 양재역 벽서 사건의 발단이 된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양재역(Yangjae station, 良才驛)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남부순환로와 강남구 강남대로의 경계에 있는 서울 지하철 3호선과 신분당선의 환승역이다. 병기역명은 서초구청(瑞草區廳)이며, 인근에 서초구청이 있다.
말죽거리. 위키백과 참조. 옛 지도에서는 마죽거리(馬竹巨里)' 또는 마죽거(馬竹巨)'라고 표기되기도 하였다. 서울 서초구의 '양재동(良才洞)'은 조선 시대에 양재역이 있어서 나온 땅이름이다. 여기서 역(驛)은 현대의 지하철역이 아니라, 여러 마리의 말을 마련해 두고 공문을 전달할 목적으로 다니는 사람에게 말을 제공해 주거나 바꾸어 주던 일을 했던 곳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 충청도나 경상도를 가려면 남대문을 나와 동작나루(동작진, 銅雀津)나 한강나루(한강진, 漢江津)를 건너 남도길에 올랐다. 당시 동작나루를 건너서 첫 번째 만나는 역은 과천역이고, 한강나루를 건너서 첫 번째 닿는 역은 양재역이었다. 한강나루는 옛날 두뭇개(두모포, 豆毛浦) 근처의 나루로, 지금의 옥수동에서 압구정동 방향으로 건너는 나루였다. 즉, 지금의 동호대교 근처에 있던 나루이다. 그 한강나루를 건너 너른 들을 지나 우면산의 동쪽 기슭을 넘어서면 양재천을 만나게 되는데, 그 냇가에 양재역이 자리잡고 있었다. 옛날의 역들은 주로 말을 먹여야 하므로 냇강에 자리잡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양재역 근처의 마을이 '역말'로, 한자로는 '역촌(驛村)'이라고 했다. 이 마을에선 말에게 죽을 먹이는 집이 많아서 길손들은 이곳을 주로 '말죽거리'라고 불렀다. 즉, '말죽거리'라는 지명은 말 그대로 '말에게 죽을 먹이는 거리'라 해서 나온 것이다. 이 유래와는 달리 '말'과 '죽'과 관련한 사실이 있어 이것이 '말죽거리'라는 이름을 낳게 했다는 이설도 있다. 조선 인조 2년(1624) 2월 8일에 인조(仁祖)가 이괄의 난을 피해 남도로 가는 길에 양재역에 이르러 기갈을 못 이기자, 유생 김이(金怡) 등이 급히 팥죽을 쑤어 임금에게 바치니, 인조가 말 위에서 그 죽을 다 마시고 과천 쪽으로 갔다. 그래서 '임금이 말 위에서 죽을 마시다'의 뜻으로 '말죽거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밖에 다른 설은 병자호란과 관련된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남한산성에 들어가자 청나라는 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이때 이곳은 청나라의 장사 용골대가 지휘하는 우익군의 병참기지였다. 즉 청나라의 기마병들이 산성을 향하여 공격을 가한 후에는 교대로 이곳 병참기지에 물러나 말의 피로를 회복시키고 말죽을 쑤어 먹였다 하여 말죽거리라 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속설로 여겨지고 있다.

 

 

이번 주 산행의 저녁 후원은 부길만 교수께서 해 주셨다.

부길만 교수님 매우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허영심 회원님 커피 잘 마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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