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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인산악회

[1945회] 검단산 산행기

by 출판N산악 2022.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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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회] 검단산 산행기

 산행 코스 : 하남검단산역 3번 출입구 - 월남전참전기념탑 검단산 들머리 - 유길준 선생 묘 - 유길준 선생 묘위 쉼터 - 전망대 바위 아래 - 정상헬기장 부근 - 헬기장 - 검단산 - 현충탑 방향 하산 - 정상전 삼거리 - 돌계단 아래 - 전망대 및 정자 - 곱돌광산 약수터 - 호국사 쉼터 - 검단산 정상 방향과 호국사 방향 갈림길 - 현충탑 - 산곡1교 검단산 날머리 - 참숯화로 왕갈비 무한리필 - 산곡1교 - 산곡2교 - 하남검단산역 3번 출입구

 산행 일시 : 2021년 4월 3일 오후 2시 00분 ∼ 오후 5시 10분 (3시간 10분 산행)

 날씨 현황(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 비. 온도(11∼18)

 참석 인원 : 강주연, 박성원, 박찬익, 이정수 (계 4명)

 안내자 : 이정수

 상세시간

13:30 하남검단산역 3번 출입구

14:00 월남전참전기념탑 검단산 들머리

14:25 유길준 선생 묘

14:40 유길준 선생 묘 위 쉼터

15:20 전망대바위 아래

15:44 정상헬기장 부근

15:48 헬기장

15:50 검단산

15:57 정상전 삼거리

16:14 돌계단 아래

16:16 ~ 16:25 전망대 및 정자

16:28 곱돌광산 약수터

16:45 호국사 쉼터

16:58 검단산 정상 방향과 호국사 방향 갈림길

17:00 현충탑

17:10 산곡1교 검단산 날머리

17:20 ~ 19:00 참숯화로 왕갈비 무한리필

19:10 산곡1교

19:27 산곡2교

19:30 하남검단산역 3번 출입구

1. 검단산 소개

2020년 4월 4일 지금으로부터 1년 전, 한국출판인산악회 제1893회 운길산→적갑산→예봉산 종주 산행하였을 때 예봉산 정상 바로 밑에서 찍었던 검단산・용마산 전경
곱돌약수터에 설치해 놓은 검단산 설명
현충탑 검단산 들머리에서 검단산 정상 방향과 호국사 방향 갈림길에 설치해 놓은 검단산의 역사와 유래

2. 검단산 산행의 의미

하남에 위치한 검단산은 서울 근교에 위치한 산인데도 2020년에는 한 번도 다녀온 적이 없는 산이었다. 그렇기에 기회가 오면 반드시 꼭 가고 싶은 산이었다. 하남시청은 사이트에서 검단산(黔丹山)(657m)을 하남시의 대표적인 명산으로 수도권에 위치한 편리함으로 인해 등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고 하였다. 한성백제 500년의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을 지키는 영산이기도 했던 검단산의 ‘검(黔)’은 거룩하고 신성한 숭배의 대상을 일컫던 말이고 ‘단(丹)’은 성스러운 제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여 ‘검단(黔丹)’이라고 하였다. 산보다는 제단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듯 하다. 백제시대 초·중기의 왕들이 국가의 번영과 태평을 위해 의식을 거행하던 제단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하며, 그 이유 때문인지 현재에도 많은 산악인들이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작년 2020년 4월 4일 한강 북쪽에 있는 운길산・적갑산・예봉산을 산행하면서 한강 남쪽에 위치한 검단산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물론 다음에는 꼭 검단산에도 오르리라고 다짐도 했었다. 그래서 기회를 보던 차에 지하철 5호선이 연장공사를 하면서 검단산에도 지하철이 운행한다는 것이었다. 지하철이 개통하면 첫 번째로 산행하려는 마음뿐 이었다. 처음에는 2020년 8월에 개통한다는 소식에 9월 경에 산행할 계획을 세웠었으며 개통이 12월로 연기되자 또 송년기념으로 산행할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연기되고 말았다. 결국 2020년에는 오르지 못한 산이 되었고 미련이 남게 된 산이 되었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검단산에 오르는 가장 가까운 역인 하남검단산역이 2021년 3월 27일 토요일에 개통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4월 첫 번째 산행으로 계획한 곳이 되었다.

그동안 검단산은 서울에서 탐방하려면 지하철을 타고 또 버스를 갈아 타야하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지하철 5호선이 하남검단산역이란 역명으로 개통되어 접근성이 좋아졌다. ‘한강을 통해 서울과 연결하고, 바다를 통해 세계를 연결한다.’는 컨셉을 지니고 있는 하남검단산역은 기존의 지하철 5호선역의 대합실에 비해 상당히 넓었다. 신설역이기에 깨끗하고 쾌적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이 역은 한 때 창우동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창우역’으로 검토되었지만 최종적으로 ‘하남검단산역’으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부역명으로 ‘스타필드 하남’이라 명명할 예정이라고 한다.

2020년 첫 번째 주인 4월 4일, 한강의 북쪽 방향에 위치한 예봉산에서 한강의 남쪽 방향에 위치한 검단산에 산행하려는 계획이 정확히 1년이 걸렸다. 그것도 정확히 364일 후인 2021년 4월 첫 번째 주인 4월 3일에 예봉산에서 결심한 검단산의 산행이 실행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많은 산행이 되었다.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하루 종일 비가 오는 것이다. 2주 연속 비가 오게 된 아쉬운 산행이 된 것이다. 작년 예봉산 산행에서의 한강 조망과 검단산 조망 그리고 잠실과 구리시의 전망은 좋은 감정으로 남아있었기에 검단산에서의 조망도 많이 기대했었다. 결국 실망이 기대보다 큰 아쉬움과 미련이 많이 남게 된 산행이 되었다.

3. 검단산 산행기

하남검단산역에 오후 1시에 도착하여 대합실으로 나와 보니 신설역의 일반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지하철 5호선의 기존 역 대합실은 많은 사람으로 인해 좁게 느껴졌었다. 특히 환승역은 더욱 좁게 느껴져 출퇴근할 시간대에는 타인과 부득이하게 부딪혀야 되었다. 하지만 이곳 하남검단산역은 대합실부터가 넓게 느껴졌다. 물론 깨끗하고 쾌적하게 건설되었으며 전반적인 조도가 밝으면서 상쾌하게 느껴졌다. 대합실에서 회원을 기다리다 자세히 살펴보니, 대합실에서 에니메이션 고등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개통일인 지난 주 토요일인 3월 27일부터 4월 23일까지 개통기념으로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중에 특히 나의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어 한참동안 감상하기도 하였다. 물론 사진으로 찍어 놓기도 하였다.​

하남검단산역 3번 출입구에 나와 검단산 방향으로 걸어가니 산곡2교다.

검단산 들머리인 검단산 공영주차장에는 월남전참전기념탑이 있으며 유길준 묘로 향하는 검단산 들머리다. 검단산 등산로 안내도에서 이번 주 산행의 안내자이신 이정수 회원님께서 앞으로 가야할 코스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그리고 앞장 서 힘차게 나아가신다. 현재 시간이 정각 오후 2시다. 이곳에서부터 이번 주 산행의 시간을 계산하기로 한다.

 

​검단산 정상으로 향하는 산행 길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첫 번째 단계는 들머리 단계로 주로 부드러운 흙길이며 완만한 코스였다. 두 번째 단계는 계단길이다. 첫 번째 단계보다 훨씬 경사도가 가파르다. 세 번째 단계는 주로 돌계단길이다. 두 번째 단계의 경사도가 40-45도였다면 세 번째 단계는 50도 이상이 되는 것 같다.

첫 번째 단계의 부드러운 흙길은 피톤치드를 충분히 느끼며 정신적 힐링을 위한 길이므로 심미적인 코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래의 동영상으로 검단산을 간접적으로 느껴보시길 바래본다.

월남전참전기념탑에서 유길준묘로 향하는 오르막 길은 부드러운 흙길이었을 텐데 야자매트를 깔아놓았다. 아마도 많은 등산객으로 인한 자연의 훼손을 최소화하고 편의성을 위해 설치해 놓은 것 같았다. 특히 비가 오면 흙길에서 등산화에 흙이 잔뜩 묻어 등산화뿐 아니라 등산복에도 지저분하였던 적이 많았다. 마침 이곳 검단산 들머리에서는 야자매트로 인해 비가 내리는데 등산화에 흙이 묻지 않아 깨끗하기는 하였지만 걷기에는 부드럽다기보다 딱딱하여 오히려 불편했었다. 월남전참전기념탑에서 약 25분에 걸쳐 올라가니 유길준 묘가 나온다.

나무위키는 유길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개화기 조선의 정치가로 본관은 기계이고 호는 구당(矩堂)이며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에서 태어났다. 15세부터 박규수 문하에서 김옥균, 박영효, 김윤식 등과 함께 공부했다. 1881년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조사 시찰단'(신사 유람단)에 참가해 근대 시기 '최초의 조선인 일본 유학생'이 되어 일본의 유명한 문명 개화론자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게이오 의숙에서 공부하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학업을 접고 1883년 귀국해서 박영효와 함께 한성순보를 발간하다가 서양 사절단인 보빙사의 일원으로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과 함께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보빙사 일행으로 미국에 갔을 때의 일화가 재미있다. 유길준이 조선인 최초로 전기를 경험하였는데 이때 "인간이 아니라 마귀의 힘으로 전기가 켜진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엘리베이터도 처음 타 본 장본인이었는데 당시에는 엘리베이터 문이 감옥 처럼 철문으로 되어 있다 보니 유길준은 자기를 가두는 줄 착각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후 미국에서 제대로 컬쳐쇼크를 받게 된 유길준은 이후 개화론을 강력히 주장하게 된다.

보빙사 임무가 끝난 뒤에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 매사추세츠 주의 거버너스아카데미에서 유학길을 밟아 '최초의 조선인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조선 정부가 출발할 때부터 합법적으로 인정한 케이스는 아니고 보빙사 수장이던 민영익의 허가 아래 국비 유학생으로 그냥 눌러앉았다. 유길준은 최초의 유학생이기는 했지만 2년여 만에 귀국해 졸업은 하지 못했다. 미국을 떠나 대서양을 건너 1년간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다 1885년 12월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서구권 정보에 대한 서유견문 같은 책들을 1885년부터 집필해 모아놨다가 10년 후인 을미개혁 때 출판하게 된다.

갑오개혁이 시작되던 1894년 비로소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여 내무부를 맡으며 갑오개혁의 이론적 기초를 담당하는 등 개혁파의 큰 손으로 활동하였다. 1895년 친일 성향이 강했던 을미개혁 때는 대대적인 반발에도 불구하고 단발령을 밀어붙였다가 수많은 유림들이 유길준을 비토하게 만든다. 단발령을 고집한 이유는 유길준의 입장에서 짧은 머리가 편하고 위생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05년 11월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이 조선을 병합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반대하였다. 국권 상실 후에는 일제의 남작 작위도 거부한다.

유길준의 저서로는 서유견문, 구당시초, 대한문전, 노동야학독본, 조선문전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서유견문은 최초의 한글 조사를 사용한 국한문 혼용 도서로만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단순한 서구 여행기가 아니라 서구의 근대 모습을 보고 우리 체질에 맞는 근대화 방안을 정치, 경제, 법률, 교육, 문화 등 다방면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한 방략서로 지금 봐도 배울 점이 있을 수 있는 양서이다.

유길준의 가족들은 대부분 친일파였는데 동생 유성준과 첫째 아들 유만겸은 중추원 참의직을 지낸 거물급 친일파에 속하고 둘째 아들 유억겸은 그래도 '합법적 공간'에서 신간회 등의 독립운동을 했었지만 1938년 '흥업 구락부 사건'을 전후해 친일파로 변절했다. 하지만 유억겸은 광복 후 연희대학교(오늘날 연세대학교) 총장, 문교부(오늘날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하여 그런 사실들은 덜 알려진 편이다.

유길준 묘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검단산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 약 15분에 걸친 오르막 산행은 유길준 선생 묘위 쉼터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검단산 정상까지는 약 2km 남았단다. 이곳의 이정표에는 다른 산과 다른 면이 있었다. 이정표 목재에 하단에 현재해발(285m)을 표시해 놓고 있었다. 지금까지 다녀 본 산에서 볼 수 없었던 거였다. 하남시에서 등산객에 대한 관심과 편의를 위해 고민하고 실행하고 있다는 노력이 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가 와 우산을 쓰고 다녀도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비가 계속내리고 있어도 오르막의 코스라 몸에서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오르막의 경사도가 크게 가파르지 않아 걷기에도 크게 힘들지 않았던 것 같았다. 이정표를 보니 검단산 들머리에서 검단산 정상까지 절반에 조금 못 미친 곳으로 판단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 검단산 정상까지 두 번째 단계의 계단길이 나온다. 첫 번째 단계의 흙길보다 경사도가 높은 코스였다. 이 코스의 동영상을 보면 금방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앞에서 걸어가는 분은 박찬익 명예회장이다.

이어서 세 번째 단계의 돌계단이 나온다. 두 번째 단계의 계단길보다 더 가파르다. 최소 50도 이상의 경사도였다. 이 길을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은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으려니 매우 번거로웠다. 화면에는 비가 많이 오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지만 소리를 키우면 비가 우산에 떨어지는 소리로 많은 비가 오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느껴진다.

유길준 선생 묘위 쉼터에서 데크 계단길과 돌계단 길을 힘들게 약 500m, 시간으로 25분을 걸어 오르니 검단산 정상까지 1.45km인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가쁜 숨을 쉬지만 비를 맞고 있는 진달래로 위안을 삼는다. 또 약 15분 정도 위로 향하니 전망대바위 아래의 국가지점번호를 만나게 된다. 전망대바위 아래에서는 검단산 정상까지 약 1.03km로 표기해 놓고 있다. 물로 이 이정표에서도 하단에 현재해발(569m)를 표기해 놓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약 1km만 가면 검단산 정상이다. 잠시 숨을 고르며 쉬지만 능선이라 그런지 바람이 세게 분다. 여기서부터 난 우산을 접었다. 우산이 바람에 의해 뒤집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온 몸은 비에 젖어 있었으며, 우의 안의 몸은 더위로 인해 땀으로 젖어 있었기에 우산이 오히려 더 번거로웠다. 이때부터 난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걷게 되었다. 이곳에서 약 100m도 안 되는 곳에 전망대 데크가 있었지만 비구름으로 인해 전혀 조망할 수가 없었다. 조망 없는 쉼보다 그냥 검단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오히려 고뇌하지 않아도 되고 평상심을 유지하는데 더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전망대바위 아래에서 검단산 정상을 향한 약 10분의 발걸음으로 검단산 정상까지 0.87km인 이정표를 만난다. 그리고 또 5분을 더 걸으니 검단산 정상까지 0.26km인 이정표를 만난다. 이곳이 정상헬기장 부근이다. 평소에 나는 모자를 잘 쓰지 않는다. 검단산 산행에서는 비가 오고 바람이 많이 불어 안경에 비를 맞지 않으려 어쩔 수 없이 모자를 썼다. 모자를 쓰고 있는 나의 모습이 내가 보더라도 매우 어색해 보인다.

정각 오후 3시 50분 검단산 정상에 올랐다. 검단산 등산로 안내도에는 월남전참전 기념탑이 있는 검단산 들머리에서 정상까지 3.5km 소요시간 1시간 50분으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정확하게 정시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산행이었다. 하지만 비구름으로 인해 하남시와 한강을 조망할 수 없었으며, 한강 북쪽 방향에 위치한 예봉산도 볼 수 없었다. 매우 아쉬운 산행이었다.

이러한 아쉬움도 검단산 정상에 도착하니 자부심과 성취감 지수가 은근히 올라간다.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오른 산행이기에 더욱 성취감이 높아지는 듯 하였다. 여기서는 비의 양도 갑자기 많아지는 듯하고 바람의 세기도 더 강해진 것 같다. 잠시 검단산 비석에서 사진을 찍고 잠시 쉬려니 내 몸에서 열기가 빠지는지 추위를 느끼게 되었다. 비를 피하며 쉬고 싶은데 쉴만한 조그마한 장소도 없다. 쉬지 못하기 때문에 인증사진만 찍고 쉴 곳을 찾아 현충탑 방향으로 내려간다.

검단산 정상에서 약 2분에 걸쳐 내려오니 정상전 삼거리에 도착한다. 이곳 또한 쉴 만한 공간이 없어 그대로 내려가기로 한다. 이곳에서 현충탑으로 내려가는 길은 곱돌약수터 방향으로 현충탑으로 내려가는 길과 산곡초교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현충탑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곱돌약수터로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의 돌계단 길이라 아무래도 무릎에 무리가 따를 것이고, 산곡초교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부드러운 흙길이라 심신의 안정감과 체력적 손실을 적게 하는 길이므로 우리는 산곡초교 방향으로 내려가기로 하였다. 정상전 삼거리에서 약 200m 정도 산곡초교 방향으로 내려가니 삼거리가 나온다. 우리는 산곡초교 방향이 아닌 현충탑 방향으로 하산하기로 한다.

검단산 정상에서 약 350m 내려오니 이정표가 나온다. 여기서 약 30m를 더 내려오니 검단산 380m인 이정표가 나온다. 검단산 정상까지 우리가 내려온 길은 380m라서 좀 돌아서 내려왔지만 부드러운 흙길이었고, 검단산 정상까지 330m지만 급경사의 돌계단 길이라 정상까지는 거의 같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판단된다.

내려오는 길에 생강나무 꽃이 예쁘게 피었다. 난 알아 보지 못했는데 이정수 회원님께서 생강나무꽃이라고 알려 주신다. 이정수 회원님만 따라가면 그 날은 나무든 꽃이든 뭐든지 한 개 이상을 알게 된다. 산뽕나무의 열매가 ‘오디’인줄 모르고 있었던 나에게는 이정수 회원님이 나무 또는 꽃 선생님이다. 오늘도 중요하고 재미있는 꽃을 알게 되었다.

생강나무 잎을 따서 냄새를 맡으면 생강향이 난다고 하여 생강나무라고 한다. 겨울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산속에서 노란 꽃을 피워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린다고 하여 보춘화(報春花)라고 한다. 꽃은 3월 초 ~ 5월 초에 잎보다 먼저 피고, 꽃색은 샛노란이다. 꽃말은 '수줍음, 사랑의 고백'이다.

생강나무는 목련목 녹나무과 생강나무속이다. 학명은 린데라 옵투실로바 블룸(Lindera obtusiloba Blume)이지만 영어명은 코리언 스파이스부시(Korean spicebush)이다. 영어명에 Korean이 들어가는 몇 안 되는 나무 중 하나다. 생강나무는 한국 자생 식물이며, 평안남도와 함경남도 이남의 산지에서 자란다. 전국 각지의 산기슭과 계곡, 개천가, 너덜지대 등 어디서나 잘 자란다. 참나무, 소나무 숲에서도 잘 자라는 등 다른 나무와도 화합성이 좋다고 한다.

생강나무를 최초로 기록한 책은 『성호사설(星胡僿說)』 제4권 〈만물문((萬物門)〉이다. 여기에서 생강나무를 '속칭 아해화(鵝孩花)라는 것이 있어, 노란 꽃은 거위 새끼의 털처럼 보들보들하고, 향기는 생강냄새와 흡사한데, 봄철이 오면 다른 꽃보다 제일 먼저 핀다. 량(梁)나라 위안띠(元帝)가 말한 으얼화(鵝兒花)와 같은 꽃이다'라고 나와 있다.

옛날 생강이 들어오기 전에는 생강나무 껍질과 잎을 말려서 가루를 내어 양념이나 향료로 썼다고 전해진다.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이라고 했으며 김유정 소설의 <동백꽃>은 생강나무꽃을 말한다.

어린 싹을 따서 말렸다가 차로 마시는데 어린 싹의 모양이 참새(雀)의 혀(舌)와 같다고 하여 작설차(雀舌茶)라 한다.

지난 3월 13일 본 산악회 정기토요산행 제1942회 수리산 산행에서 찍은 산수유 꽃

생강나무를 보면서 지난 3월 13일에 다녀왔던 수리산에서의 산수유가 생각이 났다. 꽃의 색상과 모양이 거의 비슷하게 보였던 것 같아 검색해보니 생강나무 꽃과 산수유 꽃은 유사한 점도 있지만 차이점은 더 많았다.

차이점을 자세히 살펴보자면 첫째, 생강나무는 녹나무과 생강나무속이고 산수유는 층층나무과 층층나무속이다. 둘째, 생강나무 줄기는 매끈하고, 산수유 줄기는 줄기 껍질이 여러 겹으로 붙어있어 거친 모양새이다. 셋째, 생강나무 열매는 붉거나 검고 완두콩처럼 동그랗지만 산수유 열매는 맑은 붉은색이며 타원형의 모양이다. 넷째, 두 나무는 꽃이 피는 시기, 색깔, 모양이 비슷하다. 생강나무 꽃은 둥글게 뭉쳐진 모양이고, 산수유 꽃은 불꽃이 터지는 것처럼 활짝 펼친 모양이다. 다섯째, 생강나무 꽃은 냄새가 나지만 산수유 꽃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여섯째, 생강나무는 산에 퍼져 있어 민가가 없는 산에 많고, 산수유는 열매를 채취하기 때문에 민가 주변에 많이 심어져 있다고 한다. 일곱째, 생강나무는 작설차로 만들어 마실 수도 있고, 생강의 향이 입맛을 돋우기 때문에 약초꾼들은 고기를 잎으로 쌈 싸먹었다고 하며, 사찰에서는 밀가루 전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산수유는 열매만 먹을 수 있다. 여덟째, 생강나무는 암수 딴 그루로서 암꽃과 수꽃이 각각 다른 나무에 있고, 산수유는 양성화로서 하나의 꽃에 암술과 수술이 모두 달려 있다. 아홉째, 생강나무는 꽃대가 짧고 꽃잎도 6장이고, 산수유는 꽃대가 길고 꽃잎과 꽃받침이 합쳐 진 화피(花被)가 4장이다. 열 번째, 생강나무는 꽃을 피는 줄기 끝이 녹색이고, 산수유나무는 갈색이다. 열한 번째, 생강나무 꽃은 어긋나게 달리지만 산수유는 꽃이 대칭으로 달린다.

생강나무를 사진으로 찍고 내려오니 돌계단 아래라는 국가지점번호 이정표를 만난다. 이곳에서 현충탑까지 2.0km 남았다고 되어있다.

돌계단 아래의 국가지점번호에서 약 4분을 걸쳐 내려오니 검단산 조망지이자 휴식처인 정자가 나온다. 이곳에서는 사진를 찍을 수 있도록 커다란 사진틀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휴식은 검단산 정상에서의 휴식을 대신할 수 있었다. 검단산 정상에 오르기까지 등산객을 만나지 못해 검단산 정상에서의 단체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이곳 휴식처에서 처음으로 등산객을 만나 단체 인증을 부탁하였다. 이것으로 유일한 단체사진 되었다.

정자에서의 휴식으로 잠시 추위도 녹이고 갈증도 해소한 후, 천천히 내려오니 곱돌광산 약수터가 나온다. 이 약수물은 식용할 수 있어 먹는 용도로만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부 등산객을 위한 씻는 물은 이 약수터 후방에 있었다. 이곳에서 현충탑까지 1.68km였다.

곱돌약수터에서 현충탐으로 내려오던 길에 비의 양이 많은지 조그마한 폭포를 이루고 있었다. 자주 볼 수 없는 현상이라 생각되어 얼른 동영상으로 찍어 보았다.

작은 폭포를 찍고 내려오니 호국사 쉼터에 이르고, 이곳에서 검단산 날머리로 내려가는 곳에 일직선으로 곧게 위로 뻗은 나무가 시원하게 느껴진다. 서울 근교 산의 보기 드문 나무라고 생각되어 사진으로 찍어 놓았다.

호국사 쉼터에서 쉬지 않고 내려가니 검단산 정상 방향과 호국사 방향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검단산의 역사와 유래를 읽어보고 검단산 날머리로 향한다.

검단산 정상 방향과 호국사 방향 갈림길에서 약 1분을 내려오니 검단산 날머리였다. 이곳에 도착한 시간이 정각 5시였다. 검단산 들머리인 월남전참전기념탑에서 오후 2시에 출발하고 검단산 날머리인 현충탑에 오후 5시 도착하였으므로 오늘의 산행은 정확히 3시간이었다. 비가 많이 왔음에도 검단산 들머리에서 날머리까지 3시간에 걸친 산행은 빠른 편일 것이다. 아마도 비가 내려 비구름으로 인하여 한강과 하남시의 전경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추워서 빨리 걷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는 석식할 장소를 물색해야 한다. 비가 오는 산행은 보통의 산행보다 체력의 소모가 심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칼로리가 높은 음식이 땡긴다. 박찬익 명예회장이 무한리필 왕갈비 식당을 지정하면서 후원을 하시겠단다. 왕갈비를 굽는 숯불로 마음까지 따스하게 맞아들인다. 주고 받는 폭탄주로 이번 산행의 회포를 풀어본다.

석식을 마친 시간이 정각 7시. 오후 7시가 되었는데 해가 지지 않아 희미한 빛이 남아있고 일부 구간은 가로등이 막 켜지고 있었다. 식당에서 하남검단산역으로 향하는 곳에 산곡1교가 있었다. 산곡1교에서 산곡2교까지 걸어간 후, 하남검단산역에 도착하는 것이다. 산곡1교에서 산곡2교에 이르는 산곡천변의 벚꽃이 만개하였다. 산곡천변의 청정한 물을 흡수하였는지 벚꽃은 유난히도 희고 청초하게 느껴진다.

 

검단산으로 향하던 산곡2교에서 찍은 벚꽃. 아파트 좌측 끝 지점에 산곡1교가 있다.

박찬영 감사는 이 사진을 보고 “꽃이 앉은 벤치”로 제목을 달면서 ‘어찌 사람이 앉을 수 있을까요. 바람이나 비가 고이 보낼 때까지 꽃이 잠시라도 쉬고 갔으면 좋겠네요.’라고 시인처럼 표현하였다.

 

검단산 산행은 종일 비가 와 번거로움이 많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은 표정으로 끝까지 안내해 주신 이정수 회원님께 다시 한 번 더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이정수 회원님!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행복한 산행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석식을 후원해 주신 박찬익 명예회장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왕갈비 잘 먹었습니다!

덕분에 비로 인해 소모된 체력을 충분히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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