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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인산악회

[1946회] 북한산 진달래능선・칼바위능선 산행기

by 출판N산악 2022.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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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회] 북한산 진달래능선・칼바위능선 산행기

 산행 코스 : 4.19민주묘지역(우이신설선) 2번 출입구 - 4.19탑 - 백련공원지킴터 - 김창숙 선생 묘 - 양일동 선생 묘 - 백련사 - 진달래능선 진입 - 대동문 - 칼바위능선 진입 - 칼바위 - 문필봉 - 칼바위공원지킴터・정릉탐방지원센터 갈림길 - 내원사 - 정릉탐방지원센터 - 산장두부촌 - 북한산보국문역(우이신설선) 2번 출입구

 산행 일시 : 2021년 4월 10일 오후 2시 5분 ∼ 오후 5시 40분 (3시간 35분 산행)

 날씨 현황(서울 강북구 우이동) : 맑음. 온도(8∼19)

 참석 인원 : 강주연, 박성원, 양영림, 오상환, 이정수, 이정일, 임순재, 최태경 (계 8명)

 안내자 : 최태경

 상세시간

13:30 4.19민주묘지역(우이신설선) 2번 출입구

14:57 4.19탑

14:05 백련공원지킴터

14:10 김창숙 선생 묘

14:15 양일동 선생 묘

14:18 백련사

14:37 진달래능선 진입

15:20 ~ 16:00 대동문

16:08 칼바위능선 진입

16:18 칼바위

16:50 ~ 17:00 문필봉

17:13 칼바위공원지킴터・정릉탐방지원센터 갈림길

17:20 내원사

17:40 정릉탐방지원센터

17:50 ~ 18:50 산장두부촌

19:00 북한산보국문역(우이신설선) 2번 출입구

1. 북한산 진달래능선・칼바위능선 소개

한국출판인산악회에서 북한산 산행은 매우 자주하였으므로 북한산에 대한 소개는 생략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산행한 북한산 진달래능선과 칼바위능선의 위치와 거리는 사진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사진에서와 같이 우리가 산행한 코스는 북한산 국립공원의 대동문 코스와 일치한다. 우리는 대동문 코스와 덧붙여 칼바위능선을 산행한 것이며, 게다가 내원사 코스까지 산행한 것이다.

북한산 국립공원 대동문 코스는 ‘백련공원지킴터 ~ 백련사 ~ 진달래능선 ~ 대동문’의 코스다. 자세한 설명은 북한산 국립공원( http://www.knps.or.kr/front/portal/visit/visitCourseSubMain.do?menuNo=7020092&parkNavGb=cmt_ssp_photo_pop&parkId=121500&photoId=SSPM017595 )을 참고하기 바란다. 북한산 국립공원에서 설명해 놓은 대동문 코스는 전반적으로 보통 난이도로 표시해 놓고 있으며, 백련공원지킴터에서 진달래능선을 거쳐 대동문까지 약 2.7km, 시간은 1시간 10분이 소요되는 것으로 표시해 놓고 있다.

굵고 붉은 선은 진달래능선이고 가늘고 붉은 선을 포함한 코스는 북한산 국립공원의 대동문 코스다. 우리가 산행한 코스와 동일한 코스였다.

진달래능선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4월이 되면 진달래 꽃이 능선 따라 분홍색으로 곱게 물들어 “진달래 능선”이라 부른다고 한다.

진달래하면 제일 먼저 연상되는 것은 김소월 시의 〈진달래 꽃〉이다. 이것은 나뿐 아니라 우리 회원 모두 같은 생각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진달래가 우리의 정서에 공감대를 형성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회에 김소월의 〈진달래 꽃〉 시를 감상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여 수록해 놓는다.

〈진달래 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또 진달래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옛날을 회고하는 감정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래서 진달래꽃은 고향을, 그 고향은 평화로움을 상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잠시 동심으로 돌아가 〈고향의 봄〉을 감상해 보시길 바라면서......

고향의 봄 - 작사/이원수 작곡/홍난파

https://youtu.be/Q0ysbSGL0RQ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 시와 이원수의 〈고향의 봄〉 동요로 대표되는 진달래는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하고 사랑받을 뿐 아니라 우리의 정서를 상징하고 있다.

진달래는 영어명은 코리언 로도덴드론(Korean Rhodo-dendron)이며, 코리언 로즈베이(Korean Rosebay)라는 이름은 한국인들만 쓰는 이름이다.

꽃말은 '절제, 청렴, 사랑의 즐거움'이라고 한다.

진달래꽃 색깔은 우리 민족정서에 가장 알맞은 색깔이다. 예부터 이 나라 처녀들의 아름다운 몸차림을 꾸며 주던 옷은 노랑 저고리와 분홍치마로서 그것은 이 나라의 꽃인 개나리와 진달래꽃의 색깔이다. 봄이 되면 노랑 저고리와 분홍치마의 새색씨들이 둘씩 셋씩 짝을 지어 봄바람에 치맛자락을 날리면서 바구니를 옆에 끼고 논두렁 밭두렁에서 나물 캐는 광경은 한국이 아니면 도저히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또 진달래가 필 무렵에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화[나라꽃]로 진달래꽃이 가장 적절하다는 의견은 많이 제시되었다. 구한말 때 황성신문(皇城新聞)에서도 언급이 있었고, 해방 후 군정 문교부에서도 국화인 무궁화에 이의가 있었던지 대안이 될 만한 후보 식물을 생물학회에 의뢰해온 적이 있었는데, 학회에서는 진달래를 후보화로 제시했다고 한다. 그 후 1956년에 다시 국화에 대한 논의가 일었을 때 일부 인사들이 역시 진달래를 추천했다. 당시 이민재(李敏載)씨는 조선일보(2월 8일자)에 기고한 “국화 무궁화 재검토”란 글에서 진달래를 추천하였다. 이보다 조금 앞서 조동화씨는 한국일보(2월 3~4일자)에서 진달래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주요한(朱耀翰)씨는 진달래는 정열적인 대신에 번뇌상(煩惱相)이 있다고 하여 개나리를 추천하였다고 한다.

진달래를 창꽃, 참꽃, 두견화(杜鵑花)라고도 한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가난한 사람들은 진달래가 필 무렵이면 먹을 양식이 떨어져 굵주림에 직면하곤 했다. 배고픈 사람들은 진달래 꽃을 따먹으며 허기를 달랬으므로 참 고마운 진짜 꽃이란 뜻의 참꽃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진달래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여러 개 수록해 놓으니 한 번 읽어볼만한 하다.

진달래 이야기 1

먼 옛날에 '연달뫼'라는 산이 있었다. 그 산에는 봄이 올 때마다 붉은 꽃이 피어나 온 산을 덮었으나 산이 대단히 높고 험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산에 올라가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 뒤 몇 만 년이 지난 뒤에 하느님 옆에 있던 두 천사가 죄를 지어 이 산으로 귀양을 와 그 꽃을 따 먹고 살게 되었다. 어느 맑은 날 그 산 밑에 살던 나무꾼의 아들이 그 산에 올라갔다. 그는 가장 높은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올라가던 중에 꽃이 어찌나 예쁘던지 처음에는 눈을 온전하게 뜰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수많은 꽃은 모두 연달래였다. 그는 꽃이 좋아서 천천히 거닐며 감상하였다. 그때 어디선가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천사나라 인간은 못 오는데

연달산은 하늘 산 인간은 못 올라오는 곳

향기 좋고 빛 고흔 이 꽃, 인간은 먹지 못하는 것

향기 좋고 빛 고흔 이 꽃, 무엇이라 이름 질까

연달산에 피는 꽃이니 연달래 꽃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노래가 인간인 그의 귀에 들려오자 그는 정신없이 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천사를 잡았다. 이날부터 두 천사와 한 인간은 이 꽃밭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천사들은 봄이면 꽃을 따 먹고 겨울이면 서리를 먹고 살았지만 인간은 그것만을 먹고는 살 수가 없어 다른 과일과 풀뿌리를 먹고 살았다. 그도 천사들에게 꽃먹기를 배워 꽃을 먹게 되니 그의 얼굴은 천사들 못지 않게 아름답게 되었고 목소리도 고와졌다고 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에 천사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 남자를 두고 서로 시기하여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게 되었을 때 천사 하나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남은 한 천사와 결혼을 하게 된 그는 아들과 딸 하나씩을 낳았다.

그 후 어느 봄날. 이상하게도 그 해에는 더 어여쁜 꽃들이 온 산에 피어났다. 평소처럼 꽃을 먹던 천사는 그만 죽고 말았다. 죽어가면서 남편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인 친구가 나를 죽이는구나. 이 산에 새로 피는 꽃은 모두 그 천사가 죽은 넋이니 먹으면 죽소이다. 내 장사를 치르신 뒤에 좋은 날을 가려 꽃나무를 끊으시오. 그러면 다시 순이 돋더라도 늦게 피게 될 터이니 우리들 자손에게는 늦게 피는 꽃만 먹지 말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 남편은 죽은 아내의 유언대로 했더니 그 뒤로는 가지를 끊었던 꽃은 한철 늦게 피었다.

그래서 일찍 피는 꽃만을 먹고 늦게 피는 꽃은 먹지 않았다. 일찍 피는 꽃은 다름 아닌 진달래요, 늦게 피는 꽃은 철쭉이었다. 그리하여 먹을 수 있는 것을 참꽃, 먹을 수 없는 것을 개꽃이라고 구별하게 된 것이다.

진달래 이야기 2

진달래에는 두견새와 관련된 슬픈 전설이 담겨 있다. 옛날 중국에는 두위(杜宇)라는 천신(天神)이 있었다. 인간을 너무 사랑한 두위는 인간세로 내려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백성들의 신망을 받아 수(蜀)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하지만 두위가 다스리던 수나라는 웨이(魏)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해 멸망하게 되었다. 두위는 도망쳐 복위를 꿈꿨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억울하게 죽은 두위의 넋은 두견새가 되어 수나라로 돌아가고 싶다고 밤낮으로 '꾸이수, 꾸이수(歸蜀, 歸蜀)’하고 울었다. 그래서 두견새는 꾸이수다오(归蜀道)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또 두견새가 울어서 토한 피가 떨어져 붉게 물든 꽃이 두견화, 즉 진달래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진달래 이야기 3

전설의 주인공은 같지만 내용이 다른 전승도 있다. 중국의 수(蜀)나라 왕띠(望帝) 두위(杜宇)는 위기에서 구해준 파링(筏靈)이란 신하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국외로 추방당했다. 억울하고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던 두위는 마침내 죽어 두견새가 되어 수나라 땅을 돌아다니며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어댔다. 그 피가 떨어져 진달래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두견새의 울음소리가 중국 사람들 발음으로 돌아감만 못하다는 뜻의 '부루꾸이(不如歸)'라고 들리는 듯하여 이런 전설이 생겼다고 한다.

진달래 이야기 4

딸을 잃은 나무꾼의 한이 진달래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옛날 옥황상제(玉皇上帝)에게 큰 죄를 짓고 인간 세상으로 쫓겨난 선녀가 있었다. 지상에 내려온 선녀는 어느 날 다리를 다쳤다. 그때 진 씨 성을 가진 나무꾼을 만나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선녀와 나무꾼은 부부가 되었고, 예쁜 딸을 낳아 달래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시간이 흘러 예쁜 처녀로 성장한 달래는 새로 부임한 사또의 눈에 띄게 되었다. 달래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은 사또는 달래에게 자신의 첩이 되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달래는 사또의 끈질긴 강요에도 한사코 거절했다. 화가 난 사또는 달래를 죽여 버렸고, 딸을 부둥켜안고 울던 나무꾼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그러자 달래의 시신은 온데간데없이 없어지고, 나무꾼의 시신에는 빨간 꽃이 피어나 무덤을 만들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 꽃을 나무꾼의 성과 딸의 이름을 합쳐 진달래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다.

진달래 이야기 5

자청비는 옥황상제의 아들 문도령과 사랑을 나눈다. 그러다가 문도령이 박씨 하나를 주며 “박이 크게 자랄 때 돌아오겠소.”라고 하고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러나 가을과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도 문도령은 소식도 없었다. 매일 문밖을 내다보던 자청비는 남의 집 아이들이 소 등에 땔나무를 싣고 오는 것을 보았다. 그때 소머리에는 빨간 진달래꽃이 꽂혀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가지면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종에게 “다른 집 종들은 저렇게 나무를 해 오는데 너는 뭘 하느냐? 저기 보아라. 소머리에 꽂힌 진달래가 얼마나 보기 좋으냐?”라고 말하였다. 무속신화인 「세경본풀이」에서 자청비는 옥황상제의 아들인 문도령과 기약 없는 사랑을 나눈다. 인내를 지니고 문도령을 기다리는 자청비는 진달래를 통해 시름을 잊으려한다. 자청비는 진달래를 기다림을 견디게 하는 망우초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진달래 이야기 6

5월 초순경에 주왕산을 찾는 나그네는 옥류가 흐르는 주방천(周房川)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수달래를 볼 수 있다. 수달래의 꽃모양은 진달래와 비슷하나 수달래가 더 진한 편이며, 특이한 것은 꽃이파리 하나에 반드시 20여 개의 검붉은 반점이 있는 것이다. 늦은 봄부터 초여름에 이를 때까지 주방천에서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빛깔의 꽃을 피우는 수달래는 주왕의 넋이라고 한다.

오랜 옛날 중국 진(晋)나라의 후예 주도(周鍍)는 후주천왕(後周天王)을 칭하고 당(唐)나라에 반기를 들었으나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여 요동으로 쫓겨났다가 다시 신라 땅으로 도망와 석병산(石屛山)에 숨어들었다.

이때 당나라 조정에서는 주왕이 신라 땅으로 도망했음을 알고 신라 조정에 주왕을 잡아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이 부탁을 받은 신라왕은 마일성(馬一聲) 장군의 5형제로 하여금 토벌케 하였다. 마장군의 군사들이 포위하여 공격하자 주왕의 군사들은 이에 당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주왕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주왕굴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주왕굴은 높은 낭떠러지에서 폭포수가 굴 입구를 막고 있었으므로 숨어 지내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주왕은 방심하여 어느 날 폭포수에 세수를 하기 위해 굴 입구로 나왔다가 마장군의 군사들에게 발각되어 마침내 마장군 형제의 화살을 맞아 죽고 말았다.

이때 주왕이 화살에 맞아 흘린 피는 주방천의 맑은 물을 붉게 물들이며 흘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꽃이 주방천 물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곳 사람들은 그 꽃을 주왕이 흘린 피로 말미암아 피어난 주왕의 넋으로 믿게 되었다고 한다.

진달래 이야기 7

단종의 작품으로 전하는 시는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 땅으로 유배되었을 때 그 유배지에서 두견새의 슬피 우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여 지은 시가 있다.

一自寃禽出帝宮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에서 나온 뒤로

孤身隻影碧山中 외로운 몸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는구나

假眠夜夜眠無假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들 길 바이 없고

窮恨年年恨不窮 해마다 끊으려 애써도 끝없는 한이로구나

聲斷曉岑殘月白 울음소리 새벽 산에 그치면 그믐달이 비추고

血流春谷落花紅 봄 골짜기엔 토한 피 떨어져 꽃이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 하늘은 귀 먹어 저 하소연 못 듣는데

胡乃愁人耳獨聰 어쩌다 서러운 이 몸은 귀만 홀로 밝았는고

진달래 이야기 8

조선 선조 때에 문장으로 유명했던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는 어느 해 봄에 강원도 금강산 구경을 갔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고적을 빠짐없이 묘사한 명시 수백 편을 짓고 돌아가는 길에 고성군(高城郡)의 어느 고개를 넘어 오다가 마침 그 길가에 아주 크고 오래된 진달래 한 나무에 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지팡이를 만들려고 하인을 시켜 그 나무를 자르려고 하였다. 이때 갑자기 어떤 노인이 꽃 사이에서 나와서 자기 손으로 그 나무를 베어 오산에게 주고 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써 주었다.

根盤高石最高危 높은 바위 가장 험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閱盡風霜雨雪時 바람 서리 눈 비가 다 지난 후에

採得一莖贈野老 가지를 꺾어서 촌로에게 주어 버렸으니

明年杜宇哭何枝 내년에 두견새는 어느 가지에서 울꺼나

그런 다음 그 노인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오산은 크게 놀랐다. 그리고 그 시가 신시(神詩)임을 깨닫고 자기의 금강산 시고(詩稿)를 모두 불살라 없애 버리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노인은 금강산의 산신으로 오산의 시명(詩名)이 너무 대단하여 그것을 억압하기 위하여 그렇게 현신을 하였고, 그리하여 공의 시집에는 금강산에 관한 시가 한 편도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도 공의 문집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시화나 구비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진달래 이야기 9

고려의 개국공신인 복지겸(卜智謙)에 얽힌 전설이다. 복지겸이 왕건이 통일할 때 공을 세우고 나라의 지략가로 활약하다가 노후에 고향인 면천으로 돌아왔다. 그가 원인 모를 병이 들어 온갖 좋다는 약을 다 써도 병이 낫지 않자, 그의 어린 딸 영랑이 아미산(면천 소재)에 올라 100일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꿈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이르기를 “날이 새면 은행나무 두 그루를 구해다가 뜰에 심고 앞산에 올라가 진달래꽃을 따 안샘(지금 면천초등학교 뒤에 있는 우물)의 물로 술을 빚어 100일 후에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했다. 영랑이 그대로 하였더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영랑이 정성스럽게 심고 가꾼 은행나무는 지금도 면천초등학교 교정에 서 있다. 고려의 복지겸 전설은 현재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인 면천두견주의 유래와 관련된다. 면천두견주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려던 딸의 간절한 마음으로 100일 동안의 기도 기간을 통해 숙성된 것이다. 진달래 꽃잎을 재료로 하여 향기가 좋으면서도 100일간의 숙성을 통해 다양한 약성이 우러나는 술로 잘 알려져 있다.

진달래 이야기 10

양강도 운흥군 운흥읍 소재지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와 관련된 이야기가. 이 지역에서 진달래가 가장 먼저 피고 가장 많이 핀다. 이 산의 지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 봉우리 기슭에 있는 마을에 분이라는 9살 난 소녀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어느 해 겨울 어머니가 몹시 앓았다. 어머니의 병에 진달래 꽃술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소녀는 추운 겨울날이었지만 뒷산에 올라가 진달래를 꺾어다 단지에 꽂아놓고 온갖 지성을 다해 꽃을 피웠다. 그 후 이웃 할머니한테서 진달래 꽃술을 만드는 법을 배워 와서 활짝 핀 꽃송이로 꽃술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대접하였더니 어머니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해부터 봉우리에는 진달래꽃이 철을 앞당겨 일찍 펴 온 봉우리가 진달래꽃으로 뒤덮이곤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소녀의 효성에 봉우리도 감동된 것이라고 하면서 이 봉우리를 ‘진달래 봉’이라고 하였다 한다.

진달래 이야기 11

무주군에서는 「각시소와 진달래」의 이야기기 내려온다. 그 내용은

전도(前島)[앞섬] 마을에 넉넉한 집안의 한 처녀가 살고 있었다. 이 처녀는 마음씨가 고왔지만 얼굴이 못생겨 혼기가 닥쳤음에도 좀체 혼담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때 앞섬 마을에 사는 가난한 총각이 이 처자와 결혼하면 많은 재산을 떼어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재물 욕심으로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 후에 살림이 좋아지자 남편은 색시를 외면하고 구박하였다. 슬픔을 참을 수 없었던 색시는 강물에 몸을 던졌는데 그곳이 순식간에 깊은 소가 만들어졌다가 없어졌다. 그리고 색시가 몸을 던진 바위 위에는 진달래꽃이 활짝 피어나게 되고 남편의 집안은 패가망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진달래와 가장 비슷한 꽃이 철쭉이다. 진달래와 철쭉의 차이점은 본 산악회 정기토요산행기 제1938회에서도 수록해 놓았지만 여기서 한 번 더 수록해 놓고 두고두고 봐야겠다.

<진달래와 철쭉의 차이점>

1. 진달래는 먹을 수 있는 꽃이기에 참꽃이라고 하고, 철쭉은 먹지 못하는 꽃이기 때문에 개꽃이라 한다.

2. 또 진달래는 두견화라고도 하며, 철쭉은 연달래라고도 한다.

3. 진달래는 볕이 잘 드는 양지에서 자라고, 철쭉은 산사면의 음지에서 자란다.

4. 진달래는 서울지역을 기준으로 4월 초순이 피고, 철쭉은 서울지역 기준으로 4월 말이나 5월 초에 핀다.

5. 진달래는 꽃이 다 지고 난 다음 잎이 돋고, 철쭉은 잎이 먼저 나오고 꽃이 피거나 꽃과 잎이 같이 핀다.

6. 진달래는 꽃받침이 없고, 철쭉은 꽃받침이 있다.

7. 진달래는 가지와 붙은 부분까지 꽃잎이 이어지고, 철쭉은 녹색의 작은 꽃받침이 꽃을 에워싸고 가지에 붙어있다.

8. 진달래는 꽃잎 모양이 평평하고, 철쭉은 꽃잎에 주름이 있다.

9. 진달래는 꽃잎이나 꽃에 진액이 묻어나지 않지만, 철쭉은 찐득한 점액이 있다.

10. 진달래 잎은 털이 없어 매끈한 표면이지만 철쭉의 잎은 뒷면에 작은 털로 덮여있다.

11. 진달래는 꽃잎 5장이 높이가 비슷해서 하나로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철쭉은 5장의 꽃잎이 각각 구분되어 삐죽이 나아있다.

12. 진달래의 잎은 끝이 뾰족하고, 철쭉의 잎은 끝이 둥글다.

13. 진달래의 키는 2m 내외, 철쭉은 3∽5m 정도.

14. 진달래는 꽃색이 진홍색이고 수술도 진홍색, 철쭉은 꽃색이 연분홍이고 꽃 안쪽에 점이 있으며 수술은 흰색이다.

15. 철쭉은 진달래에 비해 꽃술이 길고 색깔도 진하다.

16. 진달래 종류는 진달래, 털진달래, 왕진달래, 흰진달래, 꼬리 진달래 등이 있고, 철쭉의 종류는 철쭉, 산철쭉, 겹산철쭉, 흰산철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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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위능선이고 우측 하단 끝지점에서 내원사 방향으로 하산하여 정릉탐방지원센터로 내려왔다.

칼바위능선은 능선에 곧추 세운 칼날처럼 날카롭게 생긴 ‘칼바위’로 인하여 생긴 이름이다. 또 이 능선 북사면의 바위결이 칼로 썬 듯이 날카롭게 비껴 내린 모양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진선북스(허진 발행인, 본 산악회 회원)의 『북한산 가는 길』에서 박창규 저자는 칼바위에 오를 때를 “칼날을 촘촘히 세운 듯한 바윗결 암벽이 곧추 서있다. 높이 20여 미터가 될 것이다. 이 바위너설을 찰싹 달라붙어 기어올라야 하는데 암벽 등반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위험을 느껴 스스로 네 발로 기어오르게 되어있다. 오죽 했으면 등산 선배들이 칼바위라고 명명했겠는가.”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데크로 계단을 만들어 놓아 옛 산악 선배의 묘미를 느끼지는 못하지만 칼바위 정상에서 바라보는 만경대, 인수봉, 오봉, 신선대 등의 전경에서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할 것으로 판단된다.

진선북스(허진 발행인, 본 산악회 회원)의 『북한산 가는 길』에서 박창규 저자는 북한산 코스 중에서 정릉 기점의 “내원사 코스”를 설명해 놓고 있는데 이 코스가 우리가 하산한 코스였다. 저자는 내원사 코스를 칼바위능선에 오르는 알기 쉽고 편한 길이라고 하였다. 내원사까지는 자동차가 다닐 정도로 콘크리트 넓은 길이었다.

결국 본 산악회는 칼바위능선을 포함한 북한산 국립공원의 “대동문 코스”, “칼바위능선”, “내원사 코스” 등을 산행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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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한산 진달래능선・칼바위능선 산행기

4.19민주묘지역에 도착하니 정각 12시 5분, 이정일 고문과 임순재 회장을 만나기로 하였던 시간보다 5분이나 늦었다. 사전에 평화누리길 완주기념식과 2021년 시산제를 위한 논의를 위해 12시에 만나기로 하였던 거였다. 중찬 겸해서 논의할 장소를 찾으니, 마침 새롭게 개장준비를 하는 식당이 보였다. “오장 밥상” 상호의 식당이었다. 일반 한정식 식당은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들어가 식사되는지 물어보니 사장이 하는 말 “정식 오픈은 다음 주 월요일인 12일이지만 손님께서 오셨으므로 사전 시식회처럼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맛을 보시고 평가를 해주시고 추천을 많이 부탁합니다.”

오장밥상 메뉴판
오장밥상 3인분. 정결하고 단정한 것이 옛날 사대부 집안의 정경부인이 정성스럽게 차려 놓은 듯한 밥상이다. 수저받침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 정식 오픈 날부터 준비할 것이라고 한다. 밥은 흰 도자기에 흰색 찹쌀, 노란색 좁쌀, 검정색 흑미 3색으로 정갈하게 갖춰져 있어 구미를 돋군다. 반찬은 고급스러운 놋쇠 그릇에 깔끔하게 차려져 나왔다. 맛은 시각이 50%라고 한다. 나머지 50%는 직접 음미하시길......
오장밥상 사장님의 후덕(厚德)한 몸매와 인의(仁義)의 웃음에 정감이 더욱 어린다.

오후 1시 30분 정각, 우이신설선인 4.19민주묘지역에 6명의 회원이 모였다. 1시 30분 정각에 1팀으로 안내자인 최태경 고문과 이정일 고문, 오상환 고문, 이정수 전 감사 등 4명이 먼저 출발하였다. 2팀으로 본인을 포함하여 임순재 회장, 강주연 회원 3명이 20분 늦게 1팀을 향해 출발하였다.

4.19민주묘지역에서 약 17분을 걸어 올라가니 4.19탑이 보였다. 1팀보다 20분이 늦은 관계로 사진만 찍고 백련사 방향으로 바로 올라간다.

4.19에 대해 전 회원께서 잘 알고 계시지만 기록한다는 차원에서 국립4.19민주묘지 사이트를 참조하여 4.19혁명의 역사적 전개 과정과 역사적 의의에 대해 수록해 놓고자 한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개최될 민주당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등교시켜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에 동원하자 대구지역 고교생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것을 “2·28대구학생의거”라고 하며 불의와 부정선거에 대한 최초의 항거로 4·19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 날이었다. 이 날은 사상 유례 없는 추악하고 불법적인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민주당 마산지부의 선거무효 선언과 함께 시작된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이승만 정부는 무차별 진압에 나섰고 마산에서는 경찰의 사격으로 학생과 시민이 쓰러졌다. 무고한 시민, 학생의 죽음을 공산당의 책동으로 무마하려고 애쓰던 이 무렵, 마산시 중앙부두 앞바다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소년의 시체 한 구가 떠올랐다. 3월 15일 부정선거 항의시위에 참가했던 김주열군이 실종 20여일 만에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분노한 마산시민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진실규명은 외면한 채 무고한 시민들을 연행·검거하였고, 이에 자유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1960년 4월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위해, 불의의 독재권력에 항거한 4·19혁명이 일어났다. 4·19혁명은 한동안 「혁명」 또는 「의거」로 지칭되었으나, 5·16이후에는 「의거」로 공식화 되어 갔다. 오랫동안 「의거」나 「4·19」로 불리우던 4·19혁명에 대한 평가가 1993년에 이르러 비로소 그 의의와 정신이 재조명되어 「4·19혁명」으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결과 그 동안 공원묘지로 서울시에서 관리해 오던 4·19 묘지도 성역화 사업을 거쳐, 1995년 4월 19일(4·19 35주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뿐만 아니라 1997년 4월19일에는 최신 기법의 전시실 기능을 갖춘 4·19혁명기념관을 개관함에 따라, 4·19혁명을 계승할 정신적 산교육장임과 동시에 우리나라 민주이념의 최고 성지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4.19탑에서 약 8분을 백련사로 향해 오르니 백련공원지킴터가 나온다. 이곳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2시 5분이었다. 이번 주 산행의 시간을 이때부터 기록하기로 하였다. 이때 우리를 걱정하시는 이정일 고문께서 이곳을 지나자마자 전화를 하신다. 이정일 고문의 말씀을 참고로 열심히 백련사로 향해 가니 김창숙 선생 묘가 나온다. 김창숙 선생 묘에 뛰다시피 올라가 사진을 찍고 바로 내려와 백련산 방향으로 급하게 올라간다.

김창숙 선생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며, 교육인이기도 하여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 겸 초대 총장을 지낸 분이시다. 우리에게 존경을 받는 분이기에 설명을 덧붙여 놓고자 한다.

김창숙 선생은 1879년 7월 10일 경상도 성주목 사천방 사월곡(현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마을) 태어났다. 안중근, 한용운 등과 동갑이며 1962년 5월 10일 운명하셨다. 선생의 약력을 연대별로 설명하자면,

1905년(광무 9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라는 상소를 올렸고,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8년 대한협회가 설립되자 고향인 성주군에 대한협회 성주군 지부를 조직하고, 총무에 취임하였다.

1909년 성명(星明) 학교를 창립하였으나 '을사 5원흉 매국 성토 사건(乙巳五元凶賣國聲討事件)'으로 피체하였다.

1919년 3.1 운동 후 망명을 결심, 전국 유림 대표들이 한국 독립의 호소에 서명한 유림단 진정서를 휴대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그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귀국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참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을 지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 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쑨원을 비롯, 이문치(李文治)·임복성(林福成) 등 중국국민당의 여러 인사들과도 접촉하면서 '한국 독립 후원회', '중한 호조회'(中韓互助會)의 조직, 결성에도 기여하였다.

1920년 박은식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창간하고, 신채호와 협력해 독립운동 기관지 《천고(天鼓)》를 발간하여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유엔에 위임 통치를 청원하는 성명서를 제출하자, 신채호와 함께 이승만을 성토하는 활동을 했다. 신채호·신성모 등은 이승만을 성토했고, 김창숙은 그들의 이승만 성토에 지지를 보냈다. 1921년 4월 19일 이승만을 비판하는 성토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지은 성토문에는 신채호, 김원봉, 이극로, 오성륜, 장건상 등 54명이 서명하였다.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서로군정서의 군사 선전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25년 8월 독립운동 기지의 개간 자금 마련을 위해 김화식과 함께 국내로 잠입해 모금 활동을 펼쳤으나 계획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모금 운동으로 600여 명의 유림이 투옥되는 ‘제2차 유림단 사건’이 발생했다.

1927년 2월 만성 맹장염이 도져 상하이 공동조계(共同租界)의 영국인 병원에 입원하였고 그해 5월에 일본인 밀정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여 두 다리가 마비되어 앉은뱅이가 되었다. 끌려온 지 1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가족과 면회가 허락되었고 이때 변호사 김용무, 손치은 등이 찾아와 변론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김창숙 선생은 변론을 단호히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김창숙은 자신은 포로이며, 일본법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변호사를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명언을 남겼다.

“나는 대한사람으로 일본 변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정말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해 살기를 구하고 싶지 않다”

재판은 1928년 10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제2호 형사법정에서 변호인도 없이 개정되었다. 이때 김창숙의 불굴의 기개가 덧보이는 재판 광경이 있었다.

재판장 “본적은?”

김창숙 선생 “없다.”

재판장 “없다니?”

김창숙 선생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있겠는가?”

재판장 “그대의 꺾일 줄 모르는 투지가 장하기는 하나 조선이 무슨 힘으로 독립을 하겠다는 것인가?”

김창숙 선생 “내가 보기에는 일본인의 안목이 지나치게 근시안적인 것 같소. 그렇게 천하대세를 모르고 망동하는 것을 보면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은 반드시 망할 것이오.”

결국 무기징역이 구형되었고 징역 14년형을 선고받았다.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된 것으로 인해 형 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김창숙은 울산 백양사로 들어가 요양생활을 시작했다. 형사들이 찾아와 이름을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하라는 명령도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1940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45년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비밀 결사인 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7일 예비 검속에 걸려 왜관경찰서에 끌려간 후,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8.15 광복 후, 초창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나타냈으며 민족주의 계열에서 정치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2월 남조선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친일 세력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바로 비난 성명서를 내어 의원직을 거부했다.

성균관은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으로 격하되고 그 안에 명륜학원이 설치된다. 이후 명륜전문학원으로 되었다가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민족 해방 1년 전인 1944년에 폐교된다. 1945년 광복 후 부활하고 마침내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했다. 같은 해 11월 김창숙의 주도로 전국 유림 대회가 열렸고 전국에서 천여 명의 대표 유림들이 성균관 명륜당에 모였다. 김구가 위원장을, 이승만이 고문을 역임했다. 이 자리에서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였다.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국 향교로부터 재산을 갹출 받았고 전국 유림들이 기부금을 냈다. 그리고 학봉 이석구가 재단 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 재산을 희사하였다. 초대 학장으로 김창숙이 취임하였다. 당시에는 성균관대학 총장과 성균관 관장이 겸임이었다. 김창숙은 성규관대학교 총장에 취임하면서 "성균관은 우리나라의 유학을 높이 장려하던 곳이다. 유교가 쇠퇴하면 국가도 따라서 망하고 나라가 망하면 국학도 역시 폐한다."고 강조했다.

1948년 3월 12일 김창숙은 김구와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등과 함께 <7인 지도자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38선을 국경선으로 고착시키고 두 국가가 형성되면 남북 형제가 미.소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여 총검으로 대하게 돼 민족의 참화가 예상된다고, 한국전쟁 발발을 예언했다.

1951년 한국 전쟁 이후 대통령 이승만에게 하야경고문(下野警告文)을 보냈다가,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 전 부통령, 김성수 전 부통령, 조병옥 전 내무부장관 등과 반독재 호헌 구국 선언을 발표하였다.

1954년 저 악명 높은 ‘사사오입 개헌 파동’이 일어난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 제한을 없앤다는 기막힌 내용을 ‘사사오입(반올림)’이라는 기막힌 방법으로 통과시켜 버린 것이다. 당시 개헌 의결 정족수는 국회의원 재적 203명의 2/3인 136명이었는데, 표결 결과 135명이 찬성해 부결되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203명의 2/3는 산술적으로 135.33……이니까 이를 반올림하면 135명이 된다는 기상천외한 논리를 들고 나왔고, 끝내 개헌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이처럼 무리한 방법으로 3선에 성공했다. 이승만이 3선 연임까지 강행하자 심산이 나섰다. 그는 공개적으로 각료 중 간신배에 해당하는 몇몇을 해임시키고, 민의 조작의 주동 집단인 자유당을 해체하며, 부정선거를 무효로 선언하고 재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1959년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이승만 대통령 사퇴권고서한을 발송했다. 국가보안법 개악 당시 망국의 법이라고 강력히 비난했었다. 이러한 반독재 민주화 운동 행보로 인해, 독재 비호 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하였다.

1960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로 추대되었고,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초대회장,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으며, 그해 5월 10일 노환으로 별세한 뒤 사회장(社會葬)으로 예장(禮葬)되어 수유동에 안장되었다.

김창숙 항일 독립 운동의 애국애족 정신과 유학적 선비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심산 기념 문화 센터' 가 서울 서초구에 위치하고 있다. 고향인 성주군에는 김창숙의 생가와 그를 기리기 위한 심산기념관이 있다. 또한 생가 근처에 심산문화테마파크 조성을 추진 중이다.

김창숙 선생이 서거하자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는 심산상을 제정했다. 2000년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심산상 수상자는 심산 김창숙 선생의 기일에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관례였다. 묘소를 참배하려면 유교식으로 절을 해야 하는데 추기경이 절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거리낌 없이 절을 했다. 김 추기경은 행사 직후 "이 어른이 살아계셨다면 마땅히 찾아뵙고 절을 했어야 하는데 돌아가셨으니 묘소에서 절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심산 선생은 모두가 존경하는 분이고, 이 분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큰 절을 올린 것"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세월이 지난 후 심산사상연구회가 재정난에 허덕인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조그마한 상자를 보냈다. 그 안에는 본인이 받은 상금 700만 원에다 300만 원을 더 보탠 1,000만 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김창숙 선생 묘에서 약 5분을 걸어 올라가니 양일동 선생 묘가 나온다. 김창숙 선생 묘는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위치하여 빨리 올라가 사진을 찍었지만, 양일동 선생 묘는 꽤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다. 여기에서도 묘지를 향해 뛰다시피 올라가니 마스크로 인해 숨은 더 가빠진다. 늦어서 사진만 찍고 내려왔다.

양일동 선생에 대해서는 나무위키를 참조하여 설명해 놓는다. 양일동 선생은 1912년 12월 30일 태어나 1980년 4월 1일 운명하셨다.

독립운동 시절 김구의 제자로 활동한 후 정치에 입문하여 1980년까지 반공법 등의 제재로 원활하지 않은 정치 생활 끝 5선 의원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뜻을 같이한 동지로는 민주화 운동 당시 장준하, 김대중 등이 친한 편이었고 윤보선, 김영삼, 문익환 목사 등 여러 재야 인사들과도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1912년 전라북도 군산부에서 태어났다.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연루되어 중동중학교를 퇴교 당하였다.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1934년 북경민탁고등학교(北京民鐸高等學校)를 졸업하였으며, 졸업 후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1935년에 전단물을 가지고 일본에 가던 중 일본의 공항에서 잡혀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일본 이치타니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복역 2년 8개월만에 가석방되고, 고국으로 압송되어 농촌운동과 농민교육에 종사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면서 이승만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하였는데 우익에 소속되었다. 제1공화국 이승만 정부에서는 야당계 무소속으로 제3대, 제4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민주당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제2공화국 때는 민주당 소속으로 제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0년 12월 14일 다른 민주당 구파 소속 정치인들과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에 몸담았다. 그러다가 5.16 군사정변으로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후 진산 파동 때 범 유진산계였다가 따로 자신의 계보를 만들면서 유진산과 사이가 멀어졌다.

1973년 김홍일 등과 신민당을 탈당하여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을 창당하였다. 그 해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성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중선거구제 하에서 신민당 정운갑 후보, 민주공화당 민병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성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제만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5월 선명야당 노선을 내세운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로 취임하자 신민당과 함께 반 유신정권 투쟁에 동참하였다.

백련사 입구에 도착해서야 이번 주 산행에 참석한 회원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이때의 시간이 오후 2시 18분이었다. 백련사 입구에 도착하니 벚꽃이 아직 지지 않고 있어 몇 장의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백련사 입구에서 등산복을 정리하고 진달래능선을 향해 나아간다. 백련사 입구에서 약 20분에 걸쳐 돌계단 길을 오르니 능선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진달래능선이다. 능선에 오르니 바람의 세기가 계곡에서와 다르게 시원하게 느껴진다. 전망도 앞트임이 되어 시각적으로도 시원하게 느껴진다. 여기에 설치된 이정표에는 백련공원지킴터에서 1.1km를 걸어왔고, 대동문까지 1.6km 가야한다고 되어 있다.

배경이 좋아 홀로 셀프로 찍어보았다. 그런데 배경은 너무 하얗게 나와 배경의 효과는 떨어지고 못생긴 얼굴은 너무 크게 나왔다.

대동문 1.4km 지점에 이르니 북한산의 만경대아 인수봉이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현실의 감동은 사진으로 도저히 표현되지 않는다. 진달래능선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주봉들을 볼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이곳에서 본 산악회의 신입회원을 영입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성명은 양영림으로 본 산악회에 관심을 표명하고 오늘의 산행에 동행하기로 하였다.

오후 3시 20분 대동문에 도착하였다. 대동문을 향하는 코스에는 데크 계단길도 지난다. 대동문에서 선두인 이정일 고문, 임순재 회장, 오상환 고문, 본인과 신입회원은 후미를 약 40분 정도 기다렸다. 대동문에는 바람이 불어 땀이 젖은 몸은 은근히 냉기를 느끼게 한다. 후미를 기다리는 동안 벗었던 겉옷을 걸치고 신입회원에게 한국출판인산악회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자세히 설명하였다. 어쨌든 신입회원 영입 대상자는 많은 관심을 보이긴 하였다.

대동문 밖에서,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다.
대동문 안에서, 여기도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다.

충분한 휴식과 여유로운 한담 그리고 신입회원의 잠정적 영입으로 심신은 더욱 충만해지고 있었다. 후미를 만나 휴식을 취하게 하고는 임순재 회장, 이정일 고문, 본인과 신입회원 4명은 다시 1팀으로 재구성하고 칼바위능선을 향해 출발하였다. 2팀인 최태경 고문, 오상환 고문, 이정수 전 감사, 강주연 회원 4명은 2팀으로 재구성한 후, 충분히 휴식한 후에 정릉탐방지원센터로 출발한다고 하였다.

대동문에서 칼바위능선진입하는 구간의 북한산성
북한산성 곁에 피어있는 진달래
북한산성에서 칼바위능선으로 향하는 진입로
북한산성에서의 칼바위능선 진입로에서 바라본 칼바위. 칼바위 정상 부근에 데크 계단길이 보인다.
칼바위 정상으로 향하는 데크 계단길
수유리 방향 전경
칼바위에서 바라본 만경대, 인수봉, 영봉, 오봉, 신선대
자세히 보면 북한산성의 성벽이 보인다.
만경대, 인수봉, 노적봉을 확대하여 보니 더욱 웅장해 보인다.
오봉과 신선대 등 도봉산 자락을 보는 것만으로도 산행의 즐거움을 배로 증가시킨다.
칼바위 정상에서 바라본 북한산성 칼바위능선 진입로
벚꽃의 흰색이 점점이 보인다.
서울의 중심지인 남산도 보이고......

칼바위 정상에서 북한산의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 등 3주봉과 도봉산의 오봉과 신선대를 감상하니 만족지수와 행복지수는 최고조에 달한다. 아는 만큼 보이듯 느끼는 만큼 행복지수는 올라간다. 충분히 감상하고 감탄한 후, 도착한 곳이 문필봉이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간 몸의 수분을 충족시킨다. 이곳에서 최태경 고문께서 전화를 하신다. 정릉탐방지원센터까지 1.4km 남았다고 한다. 1팀인 우리도 서둘러 내려가기로 한다.

문필봉에서 바라본 칼바위와 북한산 주봉.
문필봉 정상에는 진달래가 깨끗하게 피어있다.

문필봉에서 하산하니 칼바위공원지킴터와 정릉탐방지원센터 방향의 갈림길이 나온다. 직진하면 칼바위공원지킴터 방향이고 우측으로 내려가면 정릉탐방지원센터 방향이다. 우리는 정릉탐방지원센터 방향으로 내려간다. 여기서부터 정릉탐방지원센터까지는 1.5km로 되어 있다. 이곳에서 약 10분 정도 내려가니 내원사가 나온다. 내원사에서 정릉탐방지원센터까지의 코스를 ‘내원사 코스’로 불린다. 정릉 지점에서는 많은 탐방객이 오르내리는 길이다.

오후 5시 40분, 정릉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하였다. 백련공원지킴터에서 오후 2시 5분에 출발하여 정릉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한 것이 오후 5시 40분이었으므로 이번 주 산행은 3시간 35분이었다. 시간으로 보면 평소보다 좀 짧은 시간의 산행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진달래능선과 칼바위능선의 산행이므로 북한산의 조망은 환상적이라고 할 정도로 감탄스러웠다. 게다가 칼바위 정상으로 향하는 스릴 넘치는 보행은 놀라움과 감탄의 연속이었다. 오히려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번 주 산행은 시간의 양보다 감탄의 질이 더 소중한 가치로 간직하게 된 산행이었다.

북한산 진달래능선을 바쁘지도 않고 늦지도 않은 걸음으로 하얀 벚꽃과 붉은 진달래를 감상하며 즐기는 산행은 지루할 겨를이 없었다. 4월의 꽃바람으로 더욱 행복한 산행이 되었다. 진달래능선에서 진달래의 진면목을 보기 어려웠지만 진달래의 향수를 감성적으로나마 만끽할 수 있도록 기꺼이 안내를 자처해 주신 최태경 고문님께 다시 한 번 더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최태경 고문님!

천천히 걸으시지만 행복이 가득합니다!

끝까지 함께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산장 두부촌’ 식당에서 석식을 후원해 주신 임순재 회장님께도 참석 회원을 대신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보쌈과 해장순두부 잘 먹었습니다!

평소에 좋아하던 순두부였습니다.

덕분에 충분히 체력을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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