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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인산악회

[1951회] 계양산・중구봉・천마산 산행기

by 출판N산악 2022.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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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회] 계양산・중구봉・천마산 산행기

 산행 코스 : 계산역(인천 1호선) → 계양산성 → 계성정 → 하느재 → 계양산(395m) → 징매이고개 생태통로 → 중구봉(276m) → 길마재 → 천마산(286m) → 서곶근린공원 → 서구청역(인천 2호선)

 산행 일시 : 2021년 5월 15일 오후 1시 30분 ∼ 오후 5시 15분 (3시간 45분 산행)

 날씨 현황(인천 계양구 계산구) : 비. 온도(17∼25)

 참석 인원 : 김현호, 박성원, 오상환, 이정수, 이정일 (계 5명)

 안내자 : 박성원

 상세시간

13:30 계산역(인천 1호선) 5번 출입구

13:50 ∼ 14:00 계양산성

14:05 ∼ 14:25 계성정(桂城亭)

14:33 하느재. 계양산 0.8km.

14:55 ∼ 15:15 계양산(해발 395m)

15:22 계양구와 서구 경계지점

15:26 한남정맥안내도

15:43 중심성지(衆心城址)

15:47 징매이고개 생태통로

15:49 중구봉 670m

16:08 ∼ 16:13 중구봉(해발 276m)

16:18 길마재. 천마산 200m.

16:23 ∼ 16:38 천마산(해발 287m)

17:15 서곶근린공원 흙먼지털이기

17:30 ∼ 18:30 정정아식당(032-568-8081)

18:37 서구청역(인천 2호선) 1번 출입구

1. 계양산(桂陽山)・중구봉(重九峯)・천마산(天馬山) 소개

작년 2020년 9월 5일, 한국출판인산악회 제1915회 산행에서 계양산 – 중구봉 – 천마산 종주한 적이 있었다. 당시를 회상하고 기록으로 남긴 산행기를 참조하여 작년과 이번 산행을 비교 검토하고자 한다.

[계양산(桂陽山)]

작년 2020년 9월 5일, 한국출판인산악회 제1915회 산행기에서의 계양산 소개는 계양구청 사이트를 참조하여 작성하였지만 이번 산행기에서는 한국문화연합회의 사이트와 부평문화원의 『地名由來誌:부평의 땅이름』를 참조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계양산(桂陽山)은 높이 395m로 인천광역시를 부평문화권과 인천문화권으로 구분하게 했던 한남정맥의 인천 구간에서 가장 높고 큰 산이다. 정상은 계양구 목상동에 위치하며, 정상을 중심으로 북쪽 산지는 목상동, 다남동이며, 동쪽 능선들은 방축동과 임학동에 속한다. 정상부의 남쪽 경사면 모두 계산동에 속하고, 서쪽은 공촌동에 해당한다. 면적은 약 383만 6천㎡에 이른다. 예로부터 계양산 자락의 마을에서 산신제나 마을 제례를 하며 신성시되었다.

계양산이란 이름은 지명의 변천에 따라 고려 초기 수주 때에는 수주악(樹州岳), 고려 의종 이후 안남도호부였을 때에는 안남산(安南山), 고려 고종 때 설치된 계양도호부 때에는 계양산(桂陽山)으로 부르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아남산(阿南山), 경명산(景明山)이라고도 하였다. 노적봉(露積峯), 환여금(環如金), 용장자산(鏞獐子山) 등의 별칭도 가지고 있다. 역사 이래로 조선시대까지 이곳을 대표하는 진산(鎭山)이자 주산(主山)이다.

계양산은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첫 번째 전설은 바다에서 떠올랐다는 전설이다. 옛날에 부평평야는 바닷물과 강물이 혼합되어 드나드는 간석지였다. 계양산의 한 줄기는 북으로 뻗어가 거의 한강에 이르는데, 한강은 그 주위를 둥글게 휘어감아 흐르면서 서해로 흐르니 마치 물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전설이 생긴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 전설은 강화 마니산(摩尼山)의 반 조각이 갈라져서 떠돌아왔다는 전설이다. 그래서 마니산을 형 산(兄山), 계양산을 아우 산(弟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계양산은 ‘위대하고 밝고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 계양산의 유래에 대해 흔히 ‘계수(桂樹)나무와 회양목(-楊木)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신빙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계양산에 회양목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계수나무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회양목((-楊木)의 ‘양(楊)’도 계양산(桂陽山)의 ‘양(陽)’과 다르다. 이러한 해석은 계양산의 음을 단순 조합해서 만든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말과 지명에 나타난 오랜 관습에서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우리말이나 지명에서 ‘검·감·곰·금·ᄀᆞᆷ’갈래의 첫 음운(音韻)인 ‘ㄱ’은 ‘높다, 거룩하다, 신성하다, 크다, 위대하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계’의 자음인 ‘ㄱ’을 이런 의미로 해석하면, 계양산이 가지고 있는 특색과 잘 부합됨을 알 수 있다. 계양산은 한강 서부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한남정맥이 광교산·백운산·모락산·수리산을 통과하고 나면 한강 서부지역이 되는데, 안산 이북에서 김포반도 북단까지 계양산보다 높은 산은 없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가장 높고 신령스럽게 보인다. 게다가 광활한 김포평야와 부평평야에서 바라본다면 계양산은 더욱더 위엄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 ‘양(陽)’은 ‘태양의 밝음이나 높음’을 상징한다. 이렇게 본다면 계양산은 ‘거룩하고 위대하고 밝고 높은 산’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역사 이래로 계양산은 조선시대까지 계양도호부, 부평도호부를 대표하는 진산(鎭山)이자 주산(主山)이다. 계양산 동쪽 기슭 봉우리에는 삼국시대부터 축조하여 사용된 계양산성(桂陽山城)이 있고, 서쪽으로는 조선 고종 20년(1883년)에 해안방비를 위해 부평고을 주민들이 참여하여 축조한 중심성(衆心城)이 징매이고개(景明峴) 능선을 따라 걸쳐 있었다.

계양산에는 세 개의 큰 봉우리가 있는데 표고 395m에 달하는 주봉을 군자봉 또는 명장군봉이라 부르고 그 봉우리와 나란히 선 것을 옥녀봉이라 부른다. 두 봉우리와 조금 떨어져 있는 봉우리를 꽃뫼봉[花山峰]이라 부른다. 그런 봉우리들 이름 때문인지 옛 사람들은 이곳을 비범하고 용감한 장군이 아름다운 미녀(옥녀)와 더불어 꽃밭에서 노니는 명승지라고 여겨왔다.

고려 때 이규보(1168~1241)는 『망해지(望海誌)』에서 “계양지경에는 길이 사면으로 났는데 오직 한 면만이 육지로 통하고 삼면은 모두 물이다.”라고 하였듯이 계양산에 올라 김포반도를 보면 동・북・서 방향이 모두 물이고 오로지 남쪽 방향만이 육지이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誌)』에는 ‘경명원서십리석곶로(景明院西十里石串路)’라는 기록이 있고 홍명희 대하소설 『임꺽정』에도 나온다.

정지석(鄭芝錫)은 계양팔경을 남기기도 하였다.

제1경 허암냉정(虛庵冷井) 검암동 허암산에 있는 찬 우물

제2경 뇌암숙운(雷岩宿雲) 벼락바위에 머무는 구름

제3경 난포영엽(蘭浦靈葉) 난지포구의 신비한 난지초 잎

제4경 계산현폭(桂山懸瀑) 계양산 절벽에 내걸린 폭포

제5경 미도낙조(尾島落照) 서해의 꼬리섬(서해 정자도)에 지는 해

제6경 응봉조휘(鷹峯朝輝) 매봉의 빛나는 아침 빛

제7경 탁옥성문(琢玉成文) 탁옥봉에서 수도하여 문장을 이룸

제8경 천마황서(天馬皇瑞) 천마산의 상서스러운 기운

[중구봉(重九峯)]

계양산과 마찬가지로 작년 2020년 9월 5일, 한국출판인산악회 제1915회 산행기에서의 중구봉 소개는 계양구청 사이트를 참조하여 작성하였지만 이번 중구봉은 부평문화원의 『地名由來誌:부평의 땅이름』를 참조하여 소개한다.

부평군 읍지에 “중구봉은 부평부 서쪽 3리”라 했으니 계양산 서쪽, 학사봉 줄기가 비틀거리며 흘러 동쪽으로 돌아간 남쪽 봉우리이다. ‘중구봉’이라 한 것은 이곳 사람들이 9월 9일 중구절에 치성을 드린 산으로 구(九)가 겹쳐 생긴 이름이라고 전한다. 또한 자세히 살펴보면 크고 작은 봉우리가 아홉 개가 겹쳐 있어 생긴 이름인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중구봉 산줄기가 지금의 인천교육대학을 감싸고 동쪽으로 흘러 가회현에서 크게 뭉치어 요즘 사람들은 ‘가현산’으로도 부르고 있다. 이 산중턱에는 근방에서 손꼽히는 명당으로 이곳에 효령대군의 손자인 영신군(永新君) 이이(李怡)를 비롯하여 현부인 죽산 박씨묘, 영신군의 둘째 아들 함원군(咸原君)과 현부인 평강 채씨묘, 함원군의 큰아들 대호군 이제안과 혜인 장수 황씨 등 효령대군의 7대손까지 18분의 상이 아담하게 자리 잡아 그 직계 종손이 지금도 묘하에 살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8일이면 효성・갈산동등 위시하여 전국에서 후손들이 세사참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천마산(天馬山)]

계양산과 마찬가지로 작년 2020년 9월 5일, 한국출판인산악회 제1915회 산행기에서의 천마산 소개는 계양구청 사이트를 참조하여 작성하였지만 이번 천마산은 부평문화원의 『地名由來誌:부평의 땅이름』를 참조하여 소개한다.

인천광역시 서구와 계양구를 가르는 천마산(天馬山)은 서구 공촌동, 가정동, 심곡동과 계양구 효성동 사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이 산에는 ‘천마와 아기장수’의 전설이 전해오며 오랫동안 ‘철마산’으로 잘못 불리웠는데 그 이유는 부평의 향토사학자인 고 조기준 선생에 따르면 1916년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세부 측량 때 도면에 ‘철마산’으로 표기하면서 ‘천마산’이 ‘철마산’으로 둔갑하였다고 한다.

서구 공촌동, 가정동, 심곡동과 계양구 효성동 사이에 걸쳐 있는 높이 226.7m의 산을 ‘철마산’이라 부르고 있다. 이 철마산(鐵馬山)은 서쪽 골짜기에서 용마가 났기 때문에 용마골[龍馬谷]이라 불러 왔는데 그 본디 이름은 천마산(天馬山)이다. 이 산 중턱의 바위에는 꼭 말발자국처럼 움푹움푹 패인 흔적들이 남아 있어 이 바위를 마제석(馬蹄石)이라 하고 이 산을 마제봉(馬蹄峰)이라고도 부른다.

천마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산 밑 가정동 마을에는 고려 말 합천 이씨가 많이 살고 있었는데 조선 초기에 명문이던 합천 이씨 문중에서 뜻밖에도 장사 아기가 태어났다. 이 장사 아기는 태어난 지 불과 한 이레만에 걸음을 걸었고 이상하게도 양어깨에 날개까지 달려 방안을 날아 다녔다 한다. 당시에는 이런 장사(壯士)나 이인(異人)이 나면 나라에서 후한을 염려하여 그 집안 일족을 모두 죽여 없앴기 때문에 그 부모는 그것이 두려워 비록 마음이 아팠지만 장사 아기를 다듬잇돌로 눌러서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이 아기장사는 휙 날아서 천장에 붙었는데 그 부모는 눈물을 흘리며 그 아기장사를 기어코 붙잡아 내려서 다듬잇돌로 누르니 아기장사는 숨을 껌벅거리며 한사코 발버둥을 치는데 이때 뜻밖에도 별안간 용마가 나타나서 그 집주위를 맴돌려 구슬프게 울다가 아기장사가 숨이 끊어지자 그 용마도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로 이 산을 용마가 있던 산이라서 ‘천마산(天馬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신성시하였다.

이러한 천마산이 1916년 조선총독부의 세부측량 때 철마산으로 도면에 표기됨으로써 천마산이 철마산으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측량기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산이름을 물어보니 천마산이라고 한 것을 철마산으로 잘못 알아 듣고 그대로 적어 넣어 오늘이 모든 지도에 철마산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2. 계양산(桂陽山)・중구봉(重九峯)・천마산(天馬山) 산행의 의미

작년 2020년 9월 5일, 한국출판인산악회 제1915회 산행에서 계양산 – 중구봉 – 천마산 산행과 이번 2021년 5월 15일 산행을 비교 검토하고자 한다.

작년에 참석한 회원은 김현호, 박성원, 박종관, 박찬익, 부길만, 오상환, 임순재 등 7명이 참석하였었다. 이번에는 작년에 참석하였던 김현호, 박성원, 오상환 외에 이정수, 이정일 2회원이 더 참석하여 5명이 산행하게 되었다.

시기로는 작년에 산행할 때가 가을의 초입이었고 여름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온도로는 최저 20도에서 최고 27도로 덥긴하였지만 구름이 많이 끼었었다. 그래도 서쪽 방향으로는 서해바다를, 동쪽 방향으로는 김포공항을, 북쪽 방향으로는 아라뱃길과 고양시를, 남쪽 방향으로는 인천시 전경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산행은 17에서 25도 사이의 온도로 작년과 비슷하였지만 오후 1시부터 내리던 비가 하루 종일 그치지 않고 내렸고 다음날 뿐 아니라 월요일 오전까지 비가 내렸다. 비로 인하여 계양산, 중구봉, 천마산에서는 전혀 조망할 수 없는 날씨였다.

올해와 작년의 산행이 똑 같은 코스이므로 비교 검토하기에 적당하리라 판단되었다. 그리고 산행의 즐거움과 함께 또 다른 재미를 누려보고자 한다.

3. 계양산(桂陽山)・중구봉(重九峯)・천마산(天馬山) 산행기

이번 주 주중의 날씨는 시원하기보다 ‘덥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더웠다. 지방은 벌써 30도까지 올라갔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주말에는 비가 온다는 소식이다. 안내자이자 총무인 본인에게는 비로 인하여 많은 회원이 참석하지 못 할 수 있다는 현실에 비를 밉게 볼 수밖에 없었다. 나 홀로 산행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회원의 건강과 친목도모의 계기가 이번 주에는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싫어서이다. 금요일까지만 해도 한 분도 참석자가 없었다. 하지만 산행하는 당일 토요일 오전 일찍이 오상환 고문과 이정수 전 감사의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이 두 분은 총무 홀로 산행할 것 같아 용기를 북돋아주려 참석한다는 후문이어서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온다.

집에서 출발하여 공항철도인 계양역에서 인천 1호선으로 환승하려는 중에 김현호 회원께 전화가 온다. 계산역에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신다. 작고 따스한 정이 감동으로 밀려온다. 염려해주는 말 한마디가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하고, 배려해주는 미세한 행동이 은덕을 배우게 한다.

집에서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비가 오지 않았는데, 계산역에 내리니 비가 제법 많이 온다. 비를 맞으면서 김현호 회원이 함께 식사하자던 “전성춘 설렁탕” 식당으로 찾아간다. 이 따스한 설렁탕 한 그릇이 오늘의 산행에 그렇게 많은 도움이 될 줄은 이때는 몰랐다. 또 후술하겠지만 점심 때 먹은 이 설렁탕 한 그릇이 체력적으로 많이 소비될 수밖에 없는 우중 산행에 그다지 지치지 않고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후 정각 1시 30분, 이정일 고문께 전화드리니 먼저 출발하라는 말씀이다. 본인과 김현호 회원, 오상환 고문, 이정수 전 감사 등 4명은 계양산성으로 출발한다. 계산역에서 약 20분에 걸쳐 계양산성 박물관을 지나 계양산성 입구에 도착한다.

계양산성 박물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 계양선언문
계양산성 입구에서 바라본 계양산. 비구름으로 쌓여있어 신비스럽게 보인다.
계양산성 입구에서 바라본 중구봉. 계양산과 마찬가지로 신비스럽게 보인다.
계양산성과 계양산을 배경으로 한 컷 찍어 본다.
계양산성 안내도 1
계양산성 안내도 2
계양산성 안내도 3

계양산성 – 한국문화원연합회 사이트와 부평문화원의 『부평사(富平史)』를 참조

계양산성은 축조 시기가 정확하지 않지만, 다년간의 발굴조사와 연구로 삼국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계양산성은 계양산(395m)이 아닌 고성산(202m)에 축조되어 경기만 방어체계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삼국시대의 계양산성은 군사적 방어시설과 더불어 지방행정과 통치의 중심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다.

계양산성은 북서-남동이 길고 북동-남서 방향은 좁은 장타원형의 모양을 이룬다. 북서쪽 끝은 서문지 일대로 202m의 고성산 봉우리이며, 남동쪽 끝은 고성산이 동남쪽으로 완만하게 흘러내리다가 계곡을 이루기 시작하는 지점으로 급경사가 시작하는 곳에 동문과 동벽을 쌓아 방어를 용이하게 하였다. 산성의 형태는 고성산 봉우리를 둘러서 쌓았기 때문에 테뫼식 산성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성의 한쪽이 높고 안쪽에 움푹하거나 평탄하여 여러 건축물들과 구조물을 배치할 수 있기 때문에 사모봉(紗帽峰)형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계양산성을 쌓은 시기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계양산성에 대한 문헌기록은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부평도호부 고적 조에 ‘계양산 고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1,937척으로 지금은 무너져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형원이 1656년(효조 7)에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부평도호부」 고적조에는 “계양고산성은 석축 둘레 1,937척으로, 전하기를 삼국시대에 쌓았다고 하나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8년에 발간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방성곽조」에도 “부평 계양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으로서, 석축 둘레가 1,937척이나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계양산은 서쪽으로 서해에 닿아 있으며 나머지 방향으로는 대부분 낮은 구릉이나 평지여서 탁 트인 시계를 갖는다. 따라서 한강하류 지역을 놓고 삼국이 쟁탈했던 삼국시대에는 관방의 주요 요충지로서 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바다를 통해서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나머지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경계하고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정자가 있는 곳에서 계양산 정상을 향해 150여 미터 되는 지점 왼쪽, 즉 산성 중간 되는 곳에 높이 210cm, 폭 356cm, 11단의 석축의 일부만 남아있으며, 내부에 헬기장과 체육공원, 정자 등이 들어서 있다.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목간과 집수정 등 계양산성의 연원을 설명해 줄 유적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계양산까지 1.2km인 이정표. 여기서부터 계양산 정상까지 약 40분 산행을 기약해본다.

계양산성 입구에서 잠시 비가 그쳐 우산을 접고, 땀을 닦고 식히며, 등산복과 등산화를 다시 한 번 더 점검하며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긴 한숨이 여유로운 한숨으로 변할 때 4명의 회원은 이심전심으로 계양산 정상으로 향했다.

계양산성 입구에서 계양산 정상으로 향하는 곳에 지붕 모양이 팔각인 계성정(桂城亭)이 세워져 있다. 계성정에서 참석하고자 후미로 열심히 올라오시는 이정일 고문을 은근히 기다리며 한담을 나눈다. 한담을 나누며 과일로 갈증과 체력을 간단히 보충하기도 하고, 본인은 등산복 안에 입었던 기능성 속옷을 벗기도 하였다. 비는 양은 점점 더 세지고 있고, 계양산 정상에서의 비구름은 더욱 짙어져 정상에 있는 철탑은 점점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도 우리 회원 일행의 얼굴과 표정에는 즐겁게 느껴진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그 자체를 즐기는 회원이니 즐겁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재미있는 만담으로 웃음이 커지는 사이 저 멀리서 이정일 고문이 올라오신다. 반갑게 맞이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한 후, 계양산 정상으로 향했다.

계성정(桂城亭). 사진으로 봐도 비의 양이 적지 않아 보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구름이 짙지 않아 비가 그칠 수 있다는 일편의 마음도 없지 않았다.

계성정(桂城亭)에서 바라본 앞으로 가야할 계양산 정상
계성정(桂城亭) 아래에 위치해 있는 경인여자대학교와 멀리 중구봉이 보인다.

계성정(桂城亭)에서 계양산 정상을 향해 출발한 후, 약 10분을 오르내리니 하느재가 나온다. 쉼터가 탐방객을 위해 편의성 있게 잘 설치해 놓았지만 계성정에서의 충분한 휴식이 있었기에 계양산 정상으로 직행한다.

하느재는 부평문화원의 『地名由來誌:부평의 땅이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계양산 주봉과 고성산 사이에 계양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하느재’라고 부른다. 이 고개는 황어향(계양 1동)의 역굴인 지금의 다남동으로 이어진 소로로 고개 넘어 중턱에서 명월사로 갈라져 들어가는 산승의 길이기도 하였다. 황어향에서 이 고개에 이르자면 굽이진 언덕길이 경사가 완만한 고로 그다지 큰 힘이 들지 않으나 부평읍 쪽의 남쪽 고갯길은 어찌나 가파른지 발을 붙이기가 어려워서 이는 고개를 넘는 길이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아 하늘재라 한 것이 하느재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하느재에서부터 계양산 정상까지는 0.8km이고 데크 계단길이다.

작년에 찍어 놓은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계단길에서 뒤돌아보니 계양산성이 있는 고성산(202m)이 비구름에 갇혀 있다. 계성정에서 쉴 때보다 비구름이 더욱 짙어졌다. 위로 올라갈수록 비구름이 많아진 듯......​

드디어 계양산 정상에 올랐다.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작년에는 하느재에서 계양산 정상으로 오를 때 몇 번을 쉬면서 오른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번 산행에서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오를 수가 있었다. 매주 산행한 덕분인지 1년도 안되어 체력이 많이 좋아졌음을 체감할 수가 있었다. 작년에 작성해 놓은 산행기를 다시 찾아보니, 작년에는 하느재에서 계양산 정상까기 0.8km를 정확히 32분만에 올랐다. 이번 산행에서는 22분만에 올랐다. 자그마치 1년만에 10분의 시간을 앞당길 수 있었다. 실질적인 상황에 나도 놀랄 수밖에 없다. 계양산 정상에 올랐으므로 성취감 지수가 올라가고, 시간을 앞당길 수가 있어서 자부심 지수도 올라간다.

올해 참석한 회원
작년에 참석 회원

계양산 정상에 올랐지만 비구름으로 인해 인천은 물론 동서남북 모든 방향의 전망을 볼 수 없어 매우 아쉬웠다. 그래서 작년에 산행한 사진으로 대체하며 대리 만족한다.

계양산 정상에 설치해 놓은 조망안내도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작년에 산행하였을 때 계양산 정상에서 찍어 놓은 남・동・북・서(위로부터 아래로) 전경
계양산 정상에서 바라본 중구봉・천마산(작년 사진)​

계양산 정상에서의 20분 정도의 휴식은 결국 비를 피하는 행위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하느재에서 올라오는 계단길에서의 체력적 소모를 보충하기에는 충분하였다. 이제는 두 번째 목적지인 중구봉으로 향한다.

계양구와 서구의 경계지점을 지나고......

한남정맥 안내도에 이른다. 한남정맥 안내도를 확대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고 있다. “한남정맥은 백두산을 시조산으로 한 우리나라 1대간 1정간 3정맥 중의 하나다. 한남정맥은 한강을 축으로 하여 강줄기의 남쪽을 따라가는 산줄기라하여 한남정맥이라 불린다. 한반도에 걸쳐있는 13정맥 중에서 가장 낮은 산줄기를 형성하여 인천의 주요 녹지축인 S자형 녹지축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속리산에서 백두대간으로부터 분기된 한남금북정맥이 안성 칠장산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나뉘어 김포 보구곶까지 178km에 걸쳐 한강유역과 경기 서해안지역을 나누고 있는 산줄기이다.”

계양산의 한남정맥을 부평문화원의 『地名由來誌:부평의 땅이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대부분이 남으로 뻗었는데, 계양산의 산줄기는 그 반대로 남에서 북으로 뻗은 것이 특이하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금강산・설악산・오대산・태백산・속리산 등을 거쳐 간다. 속리산에서 청주 상당산성으로 향하여 뻗은 산줄기를 ‘한남금북정맥’이라 했다. ‘한남’은 한강 남쪽이고, ‘금북’은 금강 북쪽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한남금북정맥’이 죽산 칠현산에 이르러 두 줄기로 갈라졌는데 북으로 뻗은 줄기를 ‘한남정맥’이라 하고, 남으로 뻗은 줄기를 ‘금북정맥’이라 한다. 칠현산에서 북으로 뻗어 용인의 보개산 - 광주 광교산 – 안양 수리산 – 소래산 – 금마산 – 주안산(만월산) - 원적산 – 천마산 – 계양산에 이르고 북으로 계속 뻗어 서구 검단의 가현산 – 수안산을 거쳐 통진의 문수산에 이르고 있다. 이 정맥에서 갈라져 뻗어 나간 산줄기를 ‘지맥(枝脈)’이라 하는데 인천・부평・김포 일대의 모든 산줄기는 모두 ‘한남정맥’인 것이다.

한남정맥 안내도를 지나면 좌우로 지나갈 수 있는 인천둘레길이 나오고 직진하면 중심성터가 나온다. 부평구에서 발간한 『부평사(富平史)』에 중심성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고 있다.

중심성은 1883년(고종 20) 부평부사 박희방이 계양산 서남쪽의 경명현을 중심으로 계양산과 중구봉을 잇는 능선 위에 축조한 성이다. 중심성 성곽은 동쪽의 계양산 본봉 능선에서 서쪽의 중구봉 능선으로 축조한 것이다. 동쪽의 길이는 171m, 서쪽의 길이는 297m, 성문이 3m로 총 연장 468m에 이른다. 성 내부는 흙과 자갈로 혼합하여 쌓은 토성(土城)이고 외부는 산 동측에 무진장 쌓여있는 적석층의 돌을 운반하여 축조한 석성(石城)으로 되어 있다. 성의 아래층 너비는 3.3m이고 정상 위층은 2m이다. 성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고 고저 위치에 따라 차이가 난다. 중심성은 당초 성첩(城堞)을 견고하게 축조하지 않아 10년도 안 되어 일부가 무너져 내린 것으로 나타나고 지금은 흙과 소석(小石)만 남아있고, 중심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안내문만 있는 실정이다.

현재 중심성의 축성에 관련하여 전해지는 기록은 ‘중심성사적비(衆心城事蹟碑)’가 유일하다. 중심성사적비에는 “계양산 서쪽에 고개가 있으니 이르기를 경명(景明)이요, 곧 연해관문이다. 내가 이 고을의 원으로 와서 관문의 방어를 마음먹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이 해 9월 그믐에 조칙이 있어 성을 쌓을 때 아전과 백성에게 관문을 막아야 고을이 평안한 점을 설명하였더니 백성들이 즐겁게 역사에 응하여 주어서 서쪽에 장대를 쌓고 병정 훈련하는 곳으로 삼았다. 문은 지명을 따라 경명(景明)이라 부르고 바다를 바라보며 방어토록 하게 하고, 중심(衆心)이라 이름한 것은 읍민의 마음으로써 성을 쌓았은즉 이것을 우리말로 여럿이 마음과 힘을 모아 성을 만들었다고 함이다. 고로 이름을 중심성이라 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요. 이때 군기를 중수하고 모든 나루에 포사들이 이를 굳게 지키는 방법으로 했다. 성을 다 쌓은 날에 고을 사람들이 이 업적을 글도 잘 못쓰는 나에게 역사의 개요을 간략히 쓸 것을 청하며 특히 읍 상하동에서 60금을 연출하여 성 쌓는 자금을 마련한 것을 갸륵하게 여기며 이 글을 쓰노라 광서(光緖) 9년 계미 10월 일 행부사 박희방 기록하여 쓴다.”고 되어 있다.

조선 말, 이양선이 자주 출현하자 고종은 장차 있을 지도 모르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비하여 교시를 내렸고 부평부사 박희방은 고을 백성들을 부역으로 동원해 1883년(고종 20) 9월에 쌓기 시작하여 한 달 만에 완공한 것이다. 계양산 경명현에 중심성을 쌓은 박희방은 축성이 끝난 뒤 성문누각 공해루에 「부평팔경(富平八景)」이라는 사언고시(四言古詩)의 한시를 써서 걸었다. 8경 중, 계양산 경명현에 관련된 내용으로는 1경인 계양고종(桂陽孤鐘, 계양산의 외로운 종이라는 뜻으로 계양산 중심성 공해루에 걸렸던 종을 말한다.), 4경인 경명낙조(景明落照, 경명현에 지는 해라는 뜻으로 계양산의 유명한 경명현, 일명 징맹이고개로 지는 저녁해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6경인 고성목적(古城牧笛, 옛 성에서 부는 목동의 피리소리라는 표현으로 계양산 고성의 정취를 담았다.) 등 3개가 있다.

중심성터에 설치된 신・구 안내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예상되어 수록해 놓기로 하였다.

구 중심성지 안내도

 

중심성지는 계산동과 공촌동 사이에 있는 경명현에 위치하고 있다.

경명현(속칭 징맹이고개)을 중심으로 동서의 능선을 따라 축도되었던 산성으로 현재는 완전히 없어지고 잔해만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고종 3년(1866년) 8월에 일어난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양호사건 등의 이양선의 침입에 위협을 느끼게 되어 왕의 칙령에 의해 고종 20년(1883년) 10월 부평부사 박희방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축조하였는데, 성문은 지명을 따라 경명문이라하고 문위에는 누각을 세워 공해루라 하였으며, 성의 이름을 민중들의 마음(心)을 모아 축조하였다고하여 중심성지 즉 중심성이라 전한다.

신 중심성터 안내도

 

1883년 10월 부평부사 박희방이 경명현에 축조한 성곽이다.

성의 이름을 중심으로 한 것은 주민들의 협조와 의연금으로 완공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인천 개항이 기정사실화되고 일본과 외세 대비하고자 설치되었던 연희진이 1882년 6월 혁파됨에 따라 부평 해안-부평도호부-(서울)도성을 잇는 육로를 차단하는 또 다른 방어 장치가 필요했다.

중심성이 위치한 경명현(징매이고개)은 교통의 중심지로, 고지에서 서해를 관측하고 방어하는데 최적의 장소였다.

1884년 1월 부평에 기연해방영을 신설하여 연해지방의 방비를 강화하는데 중심성은 해안방어 체제를 재정비하고 유사시를 대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중심성터 비석은 징매이고개 생태통로 옆에 설치해 있다. 징매이고개는 부평문화원의 『地名由來誌:부평의 땅이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계양구 계산동에서 서구 공천동으로 넘어가는 계양산 주봉 서쪽의 고개를 ‘징매이고개[景明峴]’라 했는데 그 길이가 8km에 이르러 인천 지역에서는 가장 크고 높은 고개이다. 고려 충렬왕은 몽고의 원나라 황제의 딸 제국공주와 정략결혼을 해서 원나라에 자주 드나 들었고 원래 기질이 호탕한데다 원나라의 수렵 행각을 본받아 재임시 매사냥을 즐겨 부평 고을에 다섯 번이나 행차했다고 한다. 송도 서울에 있는 국영 매방[鷹方]을 ‘징매이고개’로 이전했으니 그 매방이 있던 곳이 ‘징매이고개’ 정상에서 서쪽 50m 지점에 있어 그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근래 6차선 도로 확장공사로 흔적마저 찾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매[鷹]가 사냥을 하는데도 우리나라 산(産) ‘해동청 보라매’가 가장 뛰어나다고 몽고인 원나라까지 소문이 퍼져 이곳 매방에서 징매[徵鷹]를 해서 ‘징매이고개’라 한 것이 ‘징매이고개’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런 연유로 충렬왕 34년(1308) 계양도호부를 93년만에 없애고 한 등급을 높여 참으로 길한 고을이라서 ‘길주(吉州)’란 목사 고을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계양산에서 중구봉으로 향하는 징매이고개 생태통로 지나기 전의 안내도
계양산에서 중구봉으로 향하는 징매이고개 생태통로 지난 후의 안내도
징매이고개 생태통로 위에서 찍은 경명대로​

비는 계속 내리고, 비를 피하면서 쉴 수 있는 곳도 없다. 그래서 징매이고개를 넘어서도 중구봉으로 향한다. 징매이고개부터 중구봉까지도 온통 오르막 길이다. 비를 맞으며 열심히 걷기만 한다. 중간에 중구봉까지 670m인 이정표를 만난다.

두 번째 목적지인 중구봉에 올랐다. 계양산 정상에서 오후 3시 15분에 출발하고 중구봉에 오후 4시 8분에 도착하였으므로 53분이 걸린 것이다. 중구봉에서 계양산까지 거리는 2.4km이다. 이 거리는 계양구청의 등산로 종합안내도에 의한 계산이다. 계양산에서 징매이고개까지 거리는 1,500m, 징매이고개에서 중구봉까지 거리는 900m로 표기해 놓고 있다. 우리는 계양산 정상에서 2.4km를 53분만에 도착하였으므로 비가 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빠르게 산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구봉에서도 비가 계속 내리고 있으므로 인증 사진만 찍고 내려가야 했다. 중구봉에 설치된 이정표에는 중구봉에서 천마산까지는 0.5km이다.

중구봉에서 천마산으로 가는 중간 정도에 길마재가 나온다. 부평문화원의 『地名由來誌:부평의 땅이름』에는 길마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효성동 뒤 중구봉 주봉 옆에 가파르고 높은 고개를 이곳 사람들은 ‘길마재’라 불러 오고 있다. 이 고개는 새별이 마을에서는 고개가 있는 것조차 모르고 보이지 않으나 부평역 방면의 다른 마을에서 보면 꼭 소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하여 얹어 놓은 ‘길마’ 같이 M형으로 보이므로 이를 ‘길마재’라 불러오고 있다.

중구봉에서 5분에 걸쳐 내려온 길이었다. 이곳의 이정표에는 중구봉까지 300m, 천마산까지 200m로 되어 있다. 쉼터도 마련되어 있지만 쉬지 않고 천마산 정상으로 나아간다.

세 번째 목적지인 천마산에 도착하였다. 중구봉에서 천마산까지 500m를 10분만에 도착하였다. 비가 오고 있으므로 전경을 볼 수 없고 앞만 보고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빨리 갔으리라......

천마산 정상에는 다행스럽게도 비도 피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새벌정이 있었다. 이제는 내려갈 길만 남아서인지 회원의 앉은 자세는 여유가 묻어 나오고 표정에는 웃음이 만발한다.

새벌정에서의 15분간 휴식은 달콤하였다. 이때까지도 허기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 계산역에서 출발하여 천마산 정상까지 약 3시간의 산행이 있었고 비로 인하여 체력적 소모가 더 많았음에도 갈증이 없었고 허기도 느끼지 않으며 산행한 것은 김현호 회원이 사준 설렁탕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설렁탕 한 그릇이 이렇게 든든한지 막상 3시간의 산행도 전혀 문제가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마 설렁탕을 먹지 않고 출발하였다면 간식을 자주 챙겨 먹어야 할 뿐 아니라 우중산행에서 많은 번거로움이 있었을 것이다. 김현호 회원님께 감사의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 김현호 사장님 덕분에 이번 주 산행은 든든히 산행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천마산으로 이번 주 산행의 목적은 모두 달성하였다. 이제는 내려가 맛집을 찾아 식도락을 즐기는 일만 남았다. 천마산 정상에서 출발하여 은혜병원 뒤편의 서곶근린공원에 도착하였다. 서곶근린공원에 설치된 흙먼지털이기로 등산복 하의에 묻은 진흙을 털어냄으로서 이번 주 산행은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계산역에서 오후 1시 30분에 출발하여 서곶근린공원에 오후 5시 15분에 도착함으로서 3시간 45분 동안 산행한 것이다. 비로 인하여 평소 산행에 비해 체력적 소모가 더 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 회원은 우중산행도 즐겼다. 그것은 발걸음의 경쾌함과 웃음을 잃지 않은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정정아식당”으로 향한다. 이 식당에서 1시간 동안 별미인 닭요리로 맛을 만끽하며 만족도를 극대화시킨다.

그리고 오후 6시 37분 서구청역(인천 2호선) 1번 출입구에 도착함으로서 이번 주 산행의 일정은 종료되었다.

이번 주 계양산 – 중구봉 – 천마산 산행에 동행해 주신 회원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덕분에 즐거운 산행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또 함께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4. 후 기

이번 주 산행과 작년의 산행으로 본인의 체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절대비교해 보고자 한다. 작년과 올해의 상황이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첫째, 산행코스가 똑 같다. 둘째, 계절은 다르지만 온도는 거의 유사한 상황이다. 셋째, 작년에는 구름이 많았지만 비는 오지 않았고, 올해는 비가 왔다. 이 3가지 요소로 본인의 체력이 얼마나 향상 되었는지 직접적으로 판단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본인은 작년 3월부터 현재까지 거의 매주 산행하고 있다. 그동안 체력적으로 많이 향상되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산행으로 절대비교를 하는 것이다. 검토는 거리 대비 시간으로 책정하고자 한다.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 출발한 시점과 도착한 시점으로 비교한다. 물론 이것은 본인의 체력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2020년 9월 5일
2021년 5월 15일
계산역 – 계양산성 입구
20분
20분
계양산성 입구 - 계성정
5분
5분
계성정 - 하느재
8분
8분
하느재 – 계양산 정상
32분
22분
계양산 정상 - 징매이고개
33분
32분
징매이고개 - 중구봉
25분 (휴식 있었음)
21분 (휴식 없었음)
중구봉 – 천마산 정상
19분
10분
천마산 정상 - 흙먼지털이기
30분 (휴식 없었음)
37분 (휴식 있었음)
계산역 – 흙먼지털이기
전체 산행 시간
4시간
3시간 45분

그리고 아래와 같이 분석할 수 있었다.

1. 계산역에서 하느재까지는 작년과 올해는 시간적으로 차이가 전혀 없이 동일하였다.

2. 하느재에서 계양산 정상까지는 계속 오르막 길이라 작년보다 올해가 약 10분 정도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거의 1년간 매주 산행하였기에 체력적으로 향상된 결과일 것이다.

3. 계양산 정상에서 징매이고개는 내리막 길이라 작년과 올해는 차이가 거의 없었다.

4. 징매이고개에서 중구봉까지는 작년에는 12분간의 휴식을 취했으면서도 24분에 걸렸지만 올해는 휴식을 취하지도 않고도 21분이 걸렸다. 체력적으로 향상되었음을 절대비교에서 알 수 있었다.

5. 중구봉에서 천마산 정상까지는 작년에 19분이 걸렸지만 올해는 10분이 걸렸다. 거리는 500m였지만 올해는 10분이 걸린 것이다. 작년에 비해 절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것으로 나의 체력이 절대적으로 향상되었음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수치였다.

6. 천마산 정상에서 서곶근린공원 흙먼지털이기까지 작년에는 휴식 없이 30분이 걸렸는데, 올해는 휴식을 취하면서 37분이 걸렸다. 천마산 정상에서 서곶근린공원 흙먼지털이기까지는 내리막 길이라 실질적으로는 시간의 차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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