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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인산악회

[1937회] 남한산성 산행기

by 출판N산악 2022.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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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회] 남한산성 산행기

 산행 코스 : 산성역(8호선) 2번 출입구(9번 버스 탑승) - 남한산성 내 로터리(9번 버스 하차) - 북문 - 동장대터 - 봉암성 암문 - 봉암성 – 한봉 갈림목 - 벌봉 - 가지울 갈림목 – 법화골 갈림목 - 제2토루 갈림목 - 제1토루 갈림목 - 상사창동 갈림목 - 막은데미 고개 - 사미고개 - 골말(춘궁동) - 박이정출판사

 산행 일시 : 2021년 2월 6일 오후 2시 20분 ∼ 오후 5시 20분 (3시간 산행)

 날씨 현황(경기 성남시 수정구 산성동) : 구름. 온도(4∼10)

 참석 인원 : 박찬익 회장, 박성원, 박 연, 박찬영, 부길만, 오상환, 이범만, 이정수, 임순재, 최태경, 김옥영, 장호진 (계 12명)

 안내자 : 이정수

 상세시간

13:20 산성역(8호선) 2번 출입구 – 박 연, 박찬영, 이정수, 최태경 1팀 출발

13:30 산성역(8호선) 2번 출입구 - 부길만, 오상환, 장호진, 김옥영 2팀 출발

13:45 산성역(8호선) 2번 출입구 – 박성원, 박찬익, 이범만, 임순재 3팀 출발

14:20 남한산성 내 로터리 - 9번 버스 하차

14:25 남한산성 북문

14:44 제4암문(북암문)

14:52 제3암문(봉암성 암문)

14:54 동장대터 – 휴식, 3개팀 합류

15:13 봉암성

15:18 한봉 갈림목 – 벌봉 방향

15:23 벌봉 앞 – 상사창동 방향

15:24 벌봉. 남한산성 제13암문

15:27 가지울 갈림목 – 샘재 방향

15:28 법화골 갈림목 – 샘재 방향

13:35 제2토루 갈림목 – 샘재 방향

15:45 제1토루 갈림목 – 샘재 방향

15:50 상사창동 갈림목 – 샘재 방향

15:54 갈라진 이빨바위

15:57 새바위

15:58 새바위 아래

16:08 하사창동 갈림목 – 샘재 방향

16:20 막은데미 고개

16:45 사미고개

17:20 골말(춘궁동) – 택시 탑승 박이정출판사 건물 하차

17:45 박이정출판사

1. 남한산성 소개

경기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의 사이트에서 소개된 글을 전문 그대로 싣는다. 남한산성을 다녀온 후, 이런 기회를 통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으리라 믿고 게재하는 것이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기원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672)의 옛 터를 활용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대대적으로 구축하였습니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으로, 둘레가 12km에 이르며 산위에 도시가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 전쟁 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였습니다.

또한 남한산성은 성곽을 쌓는 축성술 면에서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한국(조선), 일본(아즈치·모모야마시대), 중국(명나라, 청나라) 사이에 광범위한 상호 교류가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영향을 받은 화포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이런 무기 체계의 발달은 남한산성의 성곽 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남한산성은 총 12.4km에 달하는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성곽을 유심히 살펴보면 돌의 종류나 성곽을 쌓은 모습이 제각기 다릅니다. 이것은 남한산성이 어느 한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기록상 통일신라시대에 쌓았던 주장성을 기초로 하여 조금씩 증축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병자호란 등의 국제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이자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성곽축성기술의 모습들을 발달단계별로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남한산성은 다른 산성들과는 달리 산성 내에 마을과 종묘·사직을 갖추었습니다. 전쟁이나 나라에 비상이 있을 때, 임금은 한양도성에서 나와 남한산성 행궁에 머무르고, 종묘에 있는 선조의 신주(神主)를 옮길 수 있는 좌전을 마련하여 조선의 임시수도로서 역할을 하였습니다.

남한산성은 자연지세, 건축구조, 도시계획적 측면에서 모두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성곽과 산성도시는 진정성의 측면에서 볼 때 충분한 역사적인 사료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진정성을 충족하기 위한 속성인 형태와 디자인, 자재와 구성 물질, 용도와 기능, 전통 기술 관리체계, 입지와 주변 환경, 비물질적 전통, 정신과 감성 등의 측면에서 남한산성에는 다양한 기록유산과 연구물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형태와 디자인에서 보면 남한산성은 동서로 긴 타원형의 포곡식 산성으로서 둘레가 12km가 넘는 토대형 산성으로 곡면을 이용하여 사격의 사각지대를 없앴고 지세에 따라 남쪽 성곽이 북쪽보다 더 높은 특성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성곽보다 높은 곳에는 방어를 위해 외성을 설치하였습니다.

자재와 구성 물질에서 남한산성은 일부 화강암과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편마암을 이용하여 축성하였고, 여장 전돌은 주변의 재료를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통 기술 관리체계에서 보면 시대별로 축성술에서 뚜렷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인조, 숙종, 영조・정조 대에 축성기법이 다르며, 관리를 위해 수어사, 승영사찰제, 3영2부제 등이 운영되었습니다.

입지와 주변 환경을 보면 도성에서 25km 떨어진 가까운 거리로 대피가 쉬우며 다수의 인구 수용이 가능하였습니다. 또한 한강과 경안천을 자연 해자로 이용하고 한강 수운과 연결되었으며, 동래로와 봉화로가 교차하는 편리한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비물질적 전통에서 보면 이런 교통의 편의성은 전염병 창궐을 유발하여 횃대놀이, 장승제 등의 민속놀이를 발달시켰으며, 청량당 도당굿과 같은 전통 신앙의 중심지, 병자호란 이후 유교 통치이념의 상징공간이자 북벌론의 중심, 그리고 광주 읍치로서 천주교 순교지로 이어졌습니다. 주민들의 생활에서는 소나무 군락 조성, 효종갱과 산성소주와 같이 읍치로서의 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민속들이 오늘까지 남아있습니다.

정신과 감성 요인들과 관련하여 남한산성은 외세에 대한 저항과 자주 의식의 구심점으로서 구한말에는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한 의병거점이 되었으며, 이승만 정권에서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국방의 성소로서 오늘날까지 주변에 군사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완전성의 측면에서 보면, 남한산성의 경관요소를 군사·통치·민속 요소로 구분하였을 때 각각의 경관요소들은 남한산성의 전체적인 가치를 표현하는데 적절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군사적 경관요소들을 보면, 1925년 대홍수에 의해 유실된 동문의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성벽과 장대, 대문, 승영사찰터 등이 온전히 남아있으며, 가능한 지속적인 보수와 개축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통치 경관요소로서 좌전, 우실, 행궁, 좌승당, 인화관터 등의 읍치 시설도 재건되거나 복원, 수리가 이루어졌습니다. 민속 경관요소에 해당하는 제례, 불교 의식, 전통 음식과 가양주, 비석, 누정, 자연 화경 등은 주민들이 대대로 전승하여 오고 있고 전체적으로 보호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 내 소나무 숲은 수도권 최대의 소나무 군락으로 보존가치가 매우 높다. 보기 드문 이 아름다운 소나무 숲은 일제 강점기에 전쟁 물자로 확보하고 땔감으로 무분별한 벌목이 이루어져 산성리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금림조합을 결성하여 소나무 숲을 가꾸고 보전하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남한산성에서는 항일운동의 근거지 중 하나로 성벽이며, 행궁이 심하게 훼손되고 남한산 초등학교 교사가 전소가 돼 전쟁의 상처가 깊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5월 10일 남한산성은 한국에서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행궁 터에 남한산성과 관련된 문화유산과 물산을 전시하는 경기도 물산 진열관이 지어졌다.

1960년대 후반들어 경기도는 남한산성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는데 필요한 남한산성 기초조사 실시와 도립공원 조성 기본 계획을 수립하였다. 먼저 남한산성 관광객 및 교통 실태에 대한 기초조사가 이뤄졌으며 이는 1969년에 발간된 「남한산성 도립공원후보지 기본조사계획보고서」에 수록되었다.

또한 위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산성리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데, 산성리에는 100여 호가 거주하였고, 공공시설로는 중부면 사무소, 남한산 초등학교, 경찰지서, 우체국, 여관이 2개, 의원과 약국이 각 1개가 있었다. 마을의 민가는 대체로 초가와 목조 건물이었고, 공공건물과 여관만 기와와 양옥집이었다. 교통로는 우남로와 함께 동문에서 산성천을 따라 광지원으로 연결되는 7.8km 폭 5m 내외의 자연 도로가 있었다. 당시 관광객 수는 1년에 15만 명 정도로 대부분 당일 관광객이었다.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남한산성의 체계적인 관리가 시작되었다. 도로개선을 위해 1974년 광지원에서 남한산성을 통과하여 성남으로 이어지는 308번(342번) 지방도의 도로 포장을 진행하였으며, 문화재 보수 복원 작업 또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같은 해에 중부면 사무소가 산성리에서 광지원리로 이전하였다.

남한산성 문화재를 보호하고 공원의 시설물을 유지, 관리하기 위해 1976년 남한산성관리사무소를 개소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자가용 시대가 열리면서 남한산성 안의 산성리 마을은 서울 인근의 관광 휴양지로 바뀌었다. 주민과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남한산성 내에 새마을금고를 비롯 산성보건진료소, 중부농업협동조합 산성리 분소가 영업을 시작하였다. 1999년 1월부터 남한산성 하수처리장이 가동되어 오폐수에 대한 처리 능력이 향상되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방자치단체, 지역문화단체 등을 중심으로 남한산성을 재조명하는 작업

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 예로,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이 1996년 4월부터 결성되어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또한 1997년 경기도의회 내에 남한산성보존협의회가 결성되었으며, 1998년 경기도에 의해 남한산성에 대한 종합적인 복원 계획이 수립되었다.

한편, 주민들이 주도하여 1999년부터 ‘산성리 마을 신문’을 발간하여 왔는데, 이는 일제시대 금림조합의 결성으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소나무 숲을 가꾸고 보전하였듯이 주민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마을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남한산성 도립공원은 「자연공원법」에 의거 자연공원 내 자연자원을 10년마다 조사하고 있으며, 자연생태계 조사자료 및 공원관리실태 자료의 DB 구축으로 생태계보전의 지속적인 분석과 학술연구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남한산성 도립공원 및 남한산성내 야생 동·식물을 보호, 관리하고 자연자원에 대한 효율적인 관리방안과 보호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정기적인 모니터링이 실시되고 있다. (경기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https://www.gg.go.kr/namhansansung-2/namhansan-culture-history)

2. 남한산성 산행기

이번 주 정기토요산행은 한국출판안산악회 제39차 정기총회를 개최하기 위한 사전 산행이었다. 몇 주 전부터 준비해온 정기총회는 코로나로 인하여 정부는 ‘5인 이상 사적모임 금지’라는 행정명령을 시행중이라 총회 장소의 선정이 문제였다. 고육지책으로 회장 사무실인 박이정출판사에서 개최하기로 하였고, 박이정출판사에서 가장 가까운 산행을 준비한 곳이 바로 남한산성 코스였다.

물론 이번 주 산행은 ‘5인 이상 사적모임 금지’의 정부시책을 준수하고자 4인 단위로 팀을 구성한 후, 시차별로 출발하는 것이었다.

본인이 12시 30분 산성역 1번 출입구에 도착한 후,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이정수 감사와 최태경 고문을 만난다. 1시 20분인데 박찬영, 박연 회원이 함께 도착한다. 이 4명을 1팀으로 먼저 남한산성으로 출발한다.

이어서 1시 30분 정각에 부길만 부회장, 오상환 부회장, 장호진 YBM 대표, 김옥영 YBM 임원이 도착하여 2팀으로 남한산성으로 출발한다.

본인을 포함하여 박찬익 회장, 임순재 부회장, 이범만 회원은 3팀으로 출발하여 남한산성 북문에서 1팀 및 2팀을 만나기로 한다.

1팀 및 2팀보다 늦게 남한산성 내 로터리 9버 버스 종점에 내려 선두인 이정수 감사에게 전전화드리니 북문을 지나고 있다고 한다. 3팀은 서둘러 북문을 향해 오른 후, 약 20여분이 지나 제4암문에서 선두인 회원을 만난다.

북문
남한산성은 성벽만으로도 절경을 이룬다.
제4암문(북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로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북문의 보조기능을 하도록 설치한 것으로 1Km 정도 내려가면 하남시 상사창동에 도달하게 된다. 이 문은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다. ​

 

제4암문에서 회원을 만나 기쁜 마음으로 인사를 나눈 후, 또 한 팀을 만나기 위해 동장대터로 향했다. 동장대터에 도착하니 최태경 고문과 부길만 부회장이 계신다. '

동장대터에서 기다리고 계신 최태경 고문과 부길만 부회장

동장대터 바로 밑에 있는 제3암문(봉암성 암문) 지난 후에야 전 회원을 합류할 수 있었다.

제3암문(봉암성 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로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원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다른 암문에 비해 매우 큰 편이다. 이 암문은 문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며, 규모 또한 폭이 2.36m, 높이가 2.65m에 달해 문루만 없을 뿐 성문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3암문(봉암성 암문) 외부에서 찍은 회원 모습

봉암성은 남한산성의 외성이다. 봉암성에 대해서는 경기일보 김산 연구소장의 기사가 잘 설명하고 있어 원문 그대로 인용하기로 한다.(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mod=news&act=articleView&idxno=1245639)

봉암성은 이름 그대로 벌바위다. 벌처럼 생긴 바위라고 해서 ‘벌봉’ 혹은 ‘벌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남한산성 본성이 주장성의 동장대 부근에서 북동쪽의 능선을 따라 이어진 봉우리로 해발이 무려 512.2m에 이른다. 남한산성의 수어장대보다 높이가 높기 때문에 벌봉의 정상에 오르면 남한산성의 서쪽과 동쪽 내부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인다.

사실 남한산성은 함락할 수 없는 산성이다. 전 세계의 산성 중에서 남한산성만큼 위력적인 산성은 없다. 산성 자체의 견고함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성곽 내부의 땅도 넓어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니 조선후기에 남한산성 안에 광주유수부의 읍치가 있었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주군의 군청이 남한산성 안에 있을 정도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적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벌봉이라 불리는 ‘봉암’을 지키지 못해서였다.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에 대한 다양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봉암의 전략적 문제 역시 제기됐다. 이곳 봉암이 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남한산성은 쓸모없는 산성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가 숙종대 들어와서 봉암성 축조가 중요하게 거론되었다. 그리고는 숙종 12년에 봉암성을 축성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광주유수인 윤지선(尹趾善)에게 담당하게 했다.

새로 축성된 봉암성의 길이는 2천120m이고 암문이 4개, 그리고 포루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 봉암성은 남한산성이 있고 주변에 새로 쌓은 성이기 때문에 ‘신성(新城)’이라고도 했고 본성에 대해서는 ‘외성(外城)’이 되며 또 동쪽에 있는 성이므로 ‘동성(東城)’이라고도 부른다.

영조 때 다시 봉암성을 보수하면서 봉암성의 중요성이 강조됐다. 영조 이후 1790년(정조 14)에 정조는 숙종 년간 축성했다가 많이 허물어진 봉암성을 다시 신축하라는 지시를 했다. 즉위 3년에 봉암성을 모두 돌아보았기에 봉암성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봉암성의 전략적 강화를 위하여 다시 중건하기로 한 것이다.

봉암성 내부에서 바라본 동서 방향 모습

봉암성 내부에서 한봉 갈림목에서 벌봉 방향으로 내려간다. 북문에서 봉암성까지는 오르막 길이었다면 봉암성에서 벌봉으로는 내려가는 길이었다. 벌봉 앞의 이정표를 지나고 벌봉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남한산성 제13암문이다.

벌봉의 남한산성 제13암문

 

벌봉을 지나고 3분 후에 가지울 갈림목에 도달한다. 가지울은 마을 근처의 골짜기가 마치 나뭇가지처럼 많이 뻗어 있고 그러한 형태의 골짜기를 가진 산이 둘러싸여 있어서 가지동 혹은 가지울이라 부른다고 한다.

가지울 갈림목에서 약 1분에는 법화골 갈림목에 도착한다. 법화골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태종의 매부인 양고리가 조선의 원두표 장군에게 패하여 전사하자 전쟁이 끝난 후 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남한산성 밖에 양고리의 고향인 법화둔의 지명을 따서 세운 법화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던 골짜기라 법화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옛 절터에는 부도(浮屠) 3기가 남아있다. 이곳을 지나니 탐방객을 위한 의자가 놓여 있다. 휴식을 취하며 나누는 한담에 회원은 여유로움과 즐거움이 배어 나온다.

법화목 갈림목에서 휴식을 취한 후, 천천 내려가니 제2토루 갈림목이 이른다. 토루(土壘)는 남한산성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하여 설치한 일정의 인위적 방어용 군사시설로 추정된다. 적이 쉽게 침입하거나 공격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능선을 깎거나 성토하여 적군에게 매우 불리한 지형이 되도록 『S』자 형태의 협곡을 만든 것이다. 적의 침입시 협곡 위 높은 곳에 매복해 있다가 쉽고 효율적으로 적을 교란 시키면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로 보인다.

이에 비해 토성(土城)은 흙으로 만든 성을 말한다. 위례둘레길에는 자연지형인 능선을 이용하여 춘궁동(궁안) 방향은 그대로 두고 적이 침입하는 산곡동 방향은 경사가 급해 지도록 흙을 깎아 성벽처럼 만든 곳과 능선과 능선 사이의 좁은 협곡에 흙을 다지고 쌓아 연결하여 성벽처럼 만든 방어용 군사시설인 토성으로 추정 되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

제2토루 갈림목과 제1토루 갈림목 사이에는 “바람재”를 지난다. 이곳 바람재는 법화사지 위 능선에서부터 개구리바위까지의 능선을 가리키며, 바람이 항상 부는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바람재를 지나자 2분 만에 제1토루 갈림목에 이른다.

제1토루 갈림목을 지나고 5분 후에는 상사창동 갈림목을 지난다. 상사창동은 조선시대 동부면 사창리의 웃말에 속했기 때문에 상사창이라 한다. 사창리란 국가 창고가 있던 곳으로 한강 수로로 운반된 각종 물자들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상사창동 갈림목을 지나니 이곳 또한 휴식의자가 놓여 있어 회원은 자연스레 휴식을 취하게 한다. 이곳에서도 회원의 표정에는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휴식을 취한 후, 샘재 방향으로 내려가니 “갈라진 이빨 바위”가 나온다. 내려가면서 보니 이빨 한 개가 가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갈라진 이빨바위
갈라진 이빨바위를 바라보며 내려오는 회원들......

 

이빨바위를 지나고 나니 “새바위”도 만난다.

새바위 아래 이정표를 지나고 10분 후에는 하사창동 갈림목에 이른다. 이곳에서 내려가며 회원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찍어본다.

회원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사진으로 담으면서 내려가니 지루한 줄 모르겠다. 어느덧 하사창동 갈림목에 도달한다.

하사창동 갈림목을 지나고 약 6분 후에는 또 휴식의자나 나온다. 이번에는 전체 단체사진이 없어 이곳에서 처음으로 단체사진을 찍게 되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 단체사진을 찍은 후, 내리막 길로 내려려가니 막은데미 고개가 나온다. 막은데미는 산이 앞을 막은 듯 하게 생겨서 붙여진 산곡초교 건너편 산동네를 말하며, 이 고개가 그 마을 뒤에 있어서 막은데미 고개라 부르고 있다.

막은데미 고개에서 위례둘레길 샘재 방향은 오르막 길이다. 봉우리 정상까지 약 7분에 걸친 경사 45도 이상의 오르막은 차가운 바람에도 땀을 흘리게 만든다. 봉우리 정상에 도착하니 휴식의자가 놓여져 있다. 오르막의 지친 발걸음이 쉴 수밖에 없었던 이곳에 의자를 배치해 놓았다니 그 배려에 감흥이 저절로 일어난다. 이곳에서의 회원은 좀 지쳐 보이긴 하다.

봉우리 정상에서 휴식을 취한 후, 샘재 방향으로 내려가니 사미고개에 도달한다. 사미고개는 하사창동과 하산곡동을 오가는 고개로 새미재 또는 삼외고개라고도 한다. 객산과 남한산성을 연결하는 주능선 중에서 가장 지대가 낮은 곳으로 고골 사람들이 광주나 이천 우(牛)시장에서 소를 가지고 올 때 이 길을 가장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이곳 사미고개에서 골말(춘궁동) 방향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제 몸은 슬슬 지쳐가고 또 정기총회할 시간이 다가오니 마음이 급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전에 시뮬레이션 해보니 이곳에서 하산하여 버스를 타고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곳에서 내려가니 콘크리트 길에 주로 창고가 많은 동네였다. 덕풍천을 건너면 바로 왕복 2차선 도로가 나온다. 지나가는 주민에게 버스정류장을 물어보니 친절히 가르쳐 주신다. 하지만 버스 운행 간격이 길어서 많이 기다릴 수 있다는 답변이다. 결국 택시를 타고 박이정출판사로 가기로 한다. 의외로 택시가 많이 보여 다행이었다.

박이정출판사에 도착하니 부득이한 사정으로 산행은 하지 못하지만 정기총회에 기꺼이 참석해 주신 허영심, 박경미 두 회원도 도착해 있다.

이것으로 이번 주 산행인 남한산성 코스는 잘 마무리가 되었다. 정기토요산행에 이렇게 많은 회원이 참석한 것은 정기총회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근본에는 열정과 의지가 포함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2021년의 정기토요산행은 앞을 많은 회원이 참석하리라 믿고 또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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